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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연의 오페라산책]서울시오페라단 ‘투란도트’ “K-오페라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했던 공연”

[손수연의 오페라산책]서울시오페라단 ‘투란도트’ “K-오페라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했던 공연”

기사승인 2023. 10. 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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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투란도트 소프라노 이윤정과 테너 이용훈 세종문화회관
서울시오페라단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한 장면. 소프라노 이윤정(왼쪽)과 테너 이용훈./세종문화회관
개인적으로 우리 클래식 음악에 한류를 의미하는 'K-'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류가 4.0 시대에 다다랐다고 할 만큼 우리 문화예술은 안팎으로 성장하고 발전했다. 대중문화 뿐 아니라 순수예술에 있어서도 오늘날 K-클래식이니, K-오페라니 하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 우리 문화예술과 아티스트들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오늘날의 현상은 좋은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 분야에 있어 'K-'가 접두사처럼 사용되는 때는 주로, 개인 단체의 후원이나 지원을 위한 주장의 명분이 되거나 외국에서 성공한 우리 음악가의 성취에 손쉽게 편승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사례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외국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우리가 변변한 도움을 준 것이 없으면서도 갑자기 'K-'라는 부담스러운 수사를 씌워 피나는 노력의 결실에 염치없이 무임승차 하려는 것만 같아 때로는 거부감이 들었다. 따라서 우리 예술가들이 이룬 성과나 업적을 대한민국 그 자체의 것으로 공유하려 하거나 지나친 자긍심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 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 무대에서 우리 성악가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며 결국 K-오페라싱어들에 대한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은 억누르기 힘들었다.

이번 공연은 미국과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주역 테너로 활발히 활동하는 이용훈의 한국 데뷔무대라 큰 화제를 모았다. 더구나 이용훈의 대표적 배역이라 할 수 있는 칼라프 왕자 역이라 관심은 더욱 고조됐다. 이 밖에도 투란도트 역에 소프라노 이윤정, 류 역에는 소프라노 서선영, 티무르 왕역에 베이스 양희준 등 압도적인 캐스팅으로 크게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여기에 연출가 손진책이 처음으로 오페라 연출을 맡은 작품이었다.

이날 공연의 출연 성악가들은 대부분 오페라에서 뒤지지 않는 연기력을 보여주는 성악가들이었다. 위의 주역 이외에도 핑, 팡, 퐁 역의 바리톤 박정민, 테너 김성진, 테너 전병호 등도 이 배역에 익숙한 베테랑들이라 할 수 있는데 연출의 영향이었을까. 합창단을 비롯한 전체 출연자들의 동작에서 불필요한 움직임은 사라지고 간결하면서도 극의 흐름에 효과적인 연기만이 남아 한결 정돈된 인상을 줬다. 전반적으로 과장되지 않은 몸짓이 출중한 가창과 좋은 조화를 이뤘다.

이태섭이 맡은 무대는 상당히 어두웠다. 투란도트의 왕국은 중국이 아닌 폭력과 강압에 억눌린 공포 국가로 설정돼 결말 부분을 제외하고는 한 차례의 무대전환도 없이 숨 막힐 듯한 긴장을 지속했다. 알툼왕은 휠체어에 실려 나오는 나약하고 노쇠한 존재로 그려졌다. 고전적 연출에서는 알툼의 방관자적 면모를 강조하느라 무대의 높고 먼 곳에 배치해 음성조차 잘 안 들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번 알툼은 휠체어를 타고 무대 중반까지 나와 노래도 또렷이 전달됐을 뿐 아니라 잔혹하고 제멋대로인 투란도트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이날 가장 관심을 모았던 테너 이용훈은 강렬하고 날카로운 리리코 스핀토 테너로 구분되는 본인의 특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는 적극적인 발성과 연기로 작품에 임했다. 특히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를 푸는 장면에서는 답을 하는 칼라프 왕자의 호기로움, 신중함 등 여러 감정을 예리하고도 극적인 가창으로 노래했다. 같은 계열의 음색을 지닌 투란도트 역의 이윤정과 함께 팽팽한 대립이 느껴지는 표현력과 연기력을 보여줘 객석의 몰입감이 더욱 상승했다.

모두가 기다리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에 이르러 그의 심적 부담이 객석까지 전해졌다. 적당한 호흡에 무리하지 않는 발성으로 아리아 자체는 무난하게 소화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의 폭발적인 성량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아쉬울 수도 있는 대목이었다. 지난 20여 년간 전 세계 최고의 오페라극장에서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는 그일지라도 고국의 데뷔무대가 주는 중압감은 상당했으리라 짐작한다. 2016년 도쿄에서 마린스키오페라 '돈 카를로'의 타이틀롤을 맡았던 그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때도 좋은 무대를 선보였으나 이번과 같이 강한 텐션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오페라 투란도트에 출연한 이용훈 세종문화회관
오페라 '투란도트'에 출연한 테너 이용훈./세종문화회관
이날 오페라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이유는 테너 이용훈의 데뷔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소프라노 이윤정, 서선영, 양희준의 활약 때문이다. 이윤정과 서선영은 말이 필요 없는 최고 기량의 소프라노들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날도 그들이 가진 역량을 최대치로 발휘하는 공연을 펼쳤다. 이윤정은 송곳 같은 날카로움과 극장을 압도하는 볼륨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얼음공주를 완성했다. 서선영 음색의 따스함과 선한 기운은 익히 알려진 바지만 이날 노래한 류 역할에서 더욱더 빛났다.

그는 최후의 아리아 '얼음장 같은 당신(Tu, che di gel sei cinta)'를 강한 호소력을 담아 노래하고는 바로 권총으로 자살한다. 죽은 류를 안고 티무르 왕과 칼라프 왕자는 절규한다. 이 장면이 감동적이었던 것은 총소리와 딱 맞아떨어진 서선영의 연기 덕분이기도 했지만 티무르 왕을 맡은 양희준의 중량감 있는 음성과 안타까운 연기가 빛을 발했다.

정인혁이 지휘한 군포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초반 푸치니가 의도한 현대음악적 야성이 진하게 드러나야 할 부분에서 다소 약하고 느슨한 표현력을 나타내 우려가 됐으나 점차 공격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연주로 성악가들의 노래를 잘 뒷받침했다. 특히 2막과 3막에서 합창의 소리를 잘 이끌어 내며 오케스트라와 조화를 이루게 만드는 세심함이 돋보였다.

연출적 측면에서 이번 오페라의 특징을 꼽자면 연극적 타당성을 말하고 싶다. 손진책은 무대 위에 선 모든 인물의 행동에 연극적인 타당성을 강조한 듯 보인다. 그들의 동작과 움직임은 음악적 흐름과 일치했고 객석에서는 인물의 행동과 설정에 대부분 납득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이 마지막 순간 결말 부분에서 흐트러졌다. 연출자가 이 작품이 해피엔딩인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밝혔고, 류를 위한 헌사라고도 미리 언급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긍을 할 수 있으나 극적인 타당성을 바탕으로 작품을 따라갔던 관객들에게 결말의 해석은 돌발적 느낌을 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오페라는 결말을 어떤 식으로 끝내든 억지스럽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오페라 '투란도트'에게 결말 논란은 숙명과도 같다.

최근 서울시오페라단의 행보가 놀랍다. 보다 유리한 환경을 가진 타 국공립오페라단이나 오페라하우스와 비교하면 우화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서 거북이를 보는 느낌이다. 토끼가 몇 발짝 깡총거리다가 잠든 동안, 악조건에 아랑곳 않고 노력한 거북이는 결승선을 코앞에 두고 있다. 이용훈의 극적 캐스팅 성사를 비롯해 화제성 면에서 근 5년간 우리 오페라계에 이렇게 큰 관심을 끈 오페라 공연이 있었나 싶다. 그리고 한국인 캐스트와 스태프만으로 완성도 또한 충분히 높은 작품을 만들어 냈다. 괜스레 'K-'를 끌어들여 견강부회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K-오페라싱어 그리고 K-오페라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했던 공연이었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단국대 교수


손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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