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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욱 칼럼] 킬러는 킬돼야

[이경욱 칼럼] 킬러는 킬돼야

기사승인 2023. 07. 2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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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욱 대기자
영어 단어 킬러(Killer)에는 대략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살인자' '살인청부업자'다. 누구의 부탁을 받았든지, 아니면 스스로 살인자의 길을 택했든지 관계없이 남을 죽이는 사람이다. 두 번째 의미는 매우 힘들거나 신나거나 뛰어나서 '죽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The exam was a real killer'라는 문장은 '그 시험 정말 (너무 어려워서) 죽여줬어' 뜻이리라. 배구에서는 높이 뜬 토스 볼을 전력을 다해 내려치는 공격 수단을 킬(kill)이라고 하고 그런 플레이를 하는 사람을 킬러라고 하는 모양이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결국 킬러는 반드시 상대방을 동반하는 단어라고 봐야 한다. 누군가를 죽여서(또는 공격해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사회, 아니 적어도 교육계에서는 요즘 '킬러 문항'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수능을 100일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킬러 문항이 우리 사회의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깊은 생채기를 남기고 있다. 킬러 문항을 풀어내야 최고 수준의 수능 점수를 요구하는 의대 등에 진학할 수 있는 수능생이나 그렇지 못한 수능생·학부모 모두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킬러 문항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 등장해 뿌리를 내리게 됐는지 불분명하다. 그 시점과 명명(命名)자를 가려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형편이다. 입 소문을 타고 여기저기 곰팡이 번지듯 번졌기 때문이리라.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먼저 '고난도 문항'을 이렇게 자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최고 난도의 문항' '가장 어려웠던 문항' 등으로 표기하면 될 걸, 듣기에 섬뜩한 단어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척 유감이다. 킬러 문항이 대부분의 수험생과는 별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수험생과 학부모, 그리고 사회 전반에 미치는 부담은 지대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킬러는 상대방이 있어야 한다. 혼자 킬러라고 떠들고 다녀봤자 실적이 없으면 킬러가 아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수험생 세계에서의 킬러는 누구이며 상대방은 누구일까. 킬러는 고난도 문항을 잘 푸는 학생이겠고 상대적 피해자인 상대방은 그 문항을 못 푼 학생으로 보면 틀림없다. 그 킬러 문항 때문에 수험생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

고교 시절 겪었던 개인적 경험이다. 당시는 우열반이 편성돼 있다가 학생들의 반발로 흐지부지되기도 했던 때다. 수십 년 전 어수선했던 시기의 일이지만, 돌이켜 보건데 그때도 킬러 문항은 존재했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우반 첫 모의고사 수학시험에서 빵점을 받았다. 난생 처음 접한 문제에 당혹감은 극에 달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했다. 수학 선생님은 빵점 맞은 '킬러의 희생자' 몇몇을 교실 앞으로 불러 세워 놓고 일장 훈시를 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학 선생님이 당시 그 어렵다는 일본 명문 대학 입시 수학 문제를 출제했고 미리 과외를 받아 그런 문제를 풀어본 적이 있는 친구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얻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치동 학원가에는 '킬러 콘텐츠 필살기' '킬러 문항 총정리' '킬러 문제 여기가 급소' 등 선전문구가 내걸려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졌다고 해도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사는 무한경쟁의 시대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낭만을 꿈꾸고 미래의 청사진을 가감 없이 가슴에 새겨 넣고 활기찬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청소년들의 특권은 보장되고 보호돼야 마땅하다.

급진적이고도 자극적인 콘텐츠가 아무리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다고 하더라도 청소년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이 낯설고 섬뜩한 단어는 기피 대상임이 분명하다. 킬러 문항 토양에서 자라난 우리의 어린 학생들이 학창 시절보다 더 치열할 수 있는 사회에 나갈 때 그 '살인의 추억'을 말끔히 지울 수 있을까. 지금 당장 우리 사회에서 킬러 단어가 킬(kill)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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