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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빈자들의 처지 개선, 오직 시장경제에서만 가능 <5>

[칼럼] 빈자들의 처지 개선, 오직 시장경제에서만 가능 <5>

기사승인 2023. 07. 2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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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
독일 <디 벨트> 前편집장 라이너 지텔만

독일 <디 벨트> 前편집장 라이너 지텔만


국내에서도 《반자본주의자들의 열 가지 거짓말》, 《부유한 자본주의, 가난한 사회주의》 등의 번역서가 출판된 독일의 저명한 저술가인 라이너 지텔만 박사(Dr. Rainer Zitelmann)가 아시아투데이에 '애덤 스미스 탄신 300주년'을 기념하는 논문을 보내왔다. 이를 황수연 전 경성대 교수가 번역한 것을 축약해 6월 16일 자에 게재했다. 그 내용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커서 전문을 매주 금요일 6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이번이 그 5회째다.  <편집자 주>


스미스는 자기 이익(self-interest)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대해 오늘날 종종 비판받는다. 그는 이기심(selfishness)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사람들이 항상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이 필요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서, 사람들이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호의에만 의존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또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도 이 맥락에서인데, 비록 이 구절이 스미스의 전 작품에서 단지 세 번만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 용어로 그는 아주 유명해졌다(그런데 이것은 슘페터와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는 구절과 비슷한데, 그는 그것을 단지 두 번만 사용했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이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많이 자기의 자본을 국내 산업을 지원하는 데 고용할 뿐만 아니라, 그래서 그 산업을 그것의 산물이 가장 크게 가치 있도록 지휘하려고도 노력함에 따라 모든 개인은 불가피하게 사회의 연간 수입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크게 하려고 노력한다. 참으로 그는 일반적으로 공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지도 않고, 또한 자기가 얼마나 그것을 증진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 그리고 그는 이 경우에, 많은 다른 경우에서와 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기 의도의 일부가 아니었던 목적을 증진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그것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점이 항상 사회에 더 나쁜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그는 흔히 사회의 이익을 그가 그것을 촉진하려고 실제로 의도하는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촉진한다. 나는 공공선을 위해 사업하는 체하는 사람들에 의해 많은 선이 행해진 것을 전혀 본 적이 없다."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이기주의적 행동과 이타주의적 행동을 대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설명하기를, 다행히, "나의 행위와 행동이 나 자신에 봉사하게 할지 나의 동료들에게 봉사하게 할지 선택하는 힘은 나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 만약 그것이 주어진다면, 인간 사회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는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이 복잡한 구조들을 창설하는 자생적 질서에 관한 그의 관념'을 과학적 사고―경제학을 훨씬 넘어 가리킨다―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가장 큰 공헌으로서 서술했다.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들은 '나(I)'를 줄이려고 시도한다. 그것들은 그저 그것을 '우리(we)'에 종속시키기를 원할 뿐인데, 국가 사회주의의 두 금언, 즉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당신의 국민이 전부다(Du bist nichts, dein Volk ist alles, You are nothing, your people are everything)'와 '자기 이익에 우선하는 공익(Gemeinwohl vor Eigenwohl, Public interest before self-interest)'이 보여주는 바와 같다. 1930년 11월의 한 연설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말했다.


"경제생활의 전 영역에서, 생활 자체 전체에서, 개인의 편익이 본질적인 것이고 전체의 편익이 개인의 편익에 의거한다는, 즉 개인의 편익이 우선 전체의 편익을 발생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누구든 제거해야 할 것이다. 반대가 진실이다. 전체의 편익이 개인의 편익을 결정한다. … 만약 이 원칙이 인식되지 않는다면, 이기심이 불가피하게 일어나서 공동체를 분열시킴이 틀림없다."


이 신념은 프랑스 혁명의 로베스피에르에서 레닌, 스탈린, 히틀러 그리고 마오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체주의 사상가, 혁명가 그리고 독재자를 단결시킨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자기의 저작 ≪혁명론(On Revolution)≫에서 썼다.


"공동 이익이 공동 적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프랑스 혁명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예가 고무한 모든 혁명에서였고, 로베스피에르에서 레닌과 스탈린에 이르는 공포 이론은 전체의 이익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참으로 영구히, 시민의 특수 이익에 적대적이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렇긴 하지만, 불합리하게도, 아렌트는 이기심 없음이 가장 높은 가치라고, 그리고 사람의 가치가 그가 자기 자신의 이익과 자기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행동하는 정도에 따라 판단될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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