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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 김일성 수령체제와 3대세습의 버팀목

숙청, 김일성 수령체제와 3대세습의 버팀목

기사승인 2015. 11. 30.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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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23편

숙청, 김일성 수령체제와 3대 세습의 버팀목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그 연원
다계급 사회 기초한 다당제 허용되어야 숙청 종식

◇장성택의 고사총 숙청

북한의 공포정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자비한 숙청이다. 특히 2013년 12월 김정은 체제의 2인자였던 장성택이 ‘고사총 총살’이라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되는 것을 지켜본 전 세계는 북한의 숙청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각인하게 되었다.

1945년 해방 뒤 북한 정권은 만들어질 무렵에는 연립체제였다.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파, 박헌영의 남로당파, 허가이의 소련파, 김두봉의 연안파, 그리고 갑산파 등으로 출발했다. 이 중에서 김일성 직계파는 가장 소수였고 투쟁경력도 미미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 여러 그룹들을 차례차례 숙청하며 유일독재체제로 만들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숙청을 그의 ‘정치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스탈린에게서 그대로 배웠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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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김일성의 러시아 방문 모습.연설문을 낭독하는 인물이 김일성이고, 왼쪽에서 두 번째가 홍명희 부수상, 그 오른쪽이 박헌영 부수상이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소련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대계급과 계층, 정당들을 청산해 나갔지만 의견분열도 많았다. 이 과정에서 소련 공산당은 볼셰비키 이외의 다른 공산주의자들은 숙청하게 되었다.

소련 공산당은 공산주의 이상을 다각적으로 토론하고 그 속에서 생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총집결하는 당이 아니었다. 볼셰비키 일파의 의견만이 옳은 것으로 대우받는 당이었다. 레닌 사후 스탈린은 이러한 논의를 주도하며 숙청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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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공포의 숙청을 자행한 소련의 스탈린, 김일성은 스탈린의 숙청방식을 그대로 답습해서 1인독재체제를 만들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끝없는 숙청

1934년 소련공산당 제 17차 대회는 반대파를 숙청하여 개최된 스탈린의 ‘승리자 대회’였다. 그런데 스탈린은 이 대회에서 선출된 스탈린파 중 무려 70%의 중앙위원들을 총살했다. ‘인민의 적’, ‘제국주의 스파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스탈린의 숙청은 끝없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스탈린은 1인독재를 완성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지지하는 핵심그룹도 끊임없이 의심하여 숙청을 계속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소련 사회는 내부적으로 노맨클라투라(특권계층), 노동계층, 농민계층, 요감시층으로 4분되었다. 그러면서 볼셰비키 1당 독재는 스탈린 1인 독재로 넘어갔다.

이 기간 동안에 가장 비참한 존재는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수십만명, 수백만명 단위로 타향에 강제로 이송되었다. 수천만명의 농민이 굶어죽은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연해주 지역에 모여 살던 우리 고려인들도 이 시기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이러한 비극은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소련의 1인독재는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후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는 비밀보고를 한 것으로 궤도가 수정된다. 이후 스탈린에게 숙청된 많은 간부들이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당시 명예를 회복한 이는 스탈린 지지자이면서도 스탈린에게 의심받아 숙청된 자에 한정된 것이었다. 스탈린파 이외의 공산주의자들은 볼셰비키 조차 명예가 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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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권 수립 무렵의 김일성(맨오른쪽), 박헌영(김일성 뒤) 등 주요 요인들, 북한 정권은 소련파, 국내파, 연안파, 갑산파 등 공산주의 각 그룹의 연합정권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김일성은 여타 그룹들을 피비린내나는 숙청으로 제거하고 유일권력을 세웠다.
◇소련 숙청, 다당제 부활 이후 종식

소련의 공산당 독재에 대한 비판은 1980년대 후반에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고 1990년대 초에 1당 독재가 무너진 후에 겨우 허용되었다. 구소련은 러시아 등 15공화국으로 분열되었다. 국가의 1계급 체제도 무너져 사회 내부에는 부르조아계급을 비롯한 다양한 계급이 생기게 되었다. ‘숙청’은 다계급 사회에 기초한 다당제가 부활한 후 비로소 종식된 것이다.

스탈린 체제의 소련에서 진행되었던 엄청난 양민학살과 숙청은 김일성의 북한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숙청은 소련보다 더 빠르고 무자비하게 재현되었다. 원래 북한에 모인 공산주의자들은 국내파건 해외파건 모두가 예외 없이 스탈린 영향 아래 있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해방 후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뛰어 넘어 스탈린주의로 공산당이 재건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당이 다른 모든 정당, 정파 단체 인사를 숙청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이 가져온 소련식 숙청방법 외에 그가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시기에 터득한 방법까지 동원해서 숙청을 감행했다.

그는 처음 정적을 제거할 때 암살도 서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1946년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 국유화를 실시한 것이 숙청의 첫 단계였다. 이 때부터 지주, 자본가, 유산 인테리들이 숙청되었다. 이 때부터 북한은 1당 독재가 강화되면서 형식상 프롤레타리아 사회로 변화했다. 동시에 당 내부의 스탈린주의자 중에서도 국내파들은 숙청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소련의 힘을 빌어 6·25전쟁을 도발한 뒤 무력통일이 실패로 돌아간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전쟁 책임을 뒤집어씌우려고 당내 최대 계파인 남로당파를 숙청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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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총책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가장 껄끄러운 존재였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6·25전쟁 직후 미제의 스파이란 누명을 씌워 처형한다.
◇김일성,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반대파 대대적 숙청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노동당 1당독재가 중국공산당 빨치산 1파 독재로 이행한 계기는 스탈린 사후 후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었다. 이 시기인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한 연안파와 이에 동조한 소련파가 1958년까지 숙청당했다 .

이 대표적인 사례가 1956년 6월부터 8월에 걸쳐서 일어난 ‘8월 종파 사건’이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발표된 ‘반당 반혁명적 종파음모책동’사건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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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게 격추 당한 미군 조종사(앞줄 가운데)를 구출한 뒤 환영연을 베푼 조선의용군 전사들. 1945년 3월 4일 산시(山西)성 신수이(沁水)현 궈좡춘(郭庄村). 김일성은 이 조선의용군 출신이 주축인 연안파도 6·25전쟁 뒤 모두 숙청한다.
이 시기 최창익, 박창옥 등 연안파, 소련파는 스탈린을 격하한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의 테제를 방패삼아 일부 지방당조직을 동원, 당정책을 비판했다. 또 당내 민주주의와 자유, 나아가 사회주의로의 이행기 전반에 걸친 ‘수정주의적’주장으로 김일성을 정면 비판했다.

이들 연안파는 ‘인민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연성과 인민정권에 대한 당의 영도를 부정했다. 또 당의 민주집중제 원칙에 반대하며 당내 종파활동의 자유와 종파유익설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 계열은 최창익 일파는 교조주의에 반대한다는 구실 아래 수정주의에 빠지고 말았으며, 우익투항주의로까지 전락했다고 비난했다. 또 김일성 계열은 교조주의, 수정주의를 다 반대하며, 그 뿌리에 있는 종파주의를 반대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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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중국 반대에도 숙청 계속

김일성 계열은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등을 ‘반당종파분자’로 규정, 출당처분을 내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56년말에 최창익 일파 및 연안파 세력들은 투옥, 연금되고 총살당했다.

그러나 이 시기 소련과 중국은 김일성의 숙청을 저지하려고 압력을 넣었다. 1956년 9월 소련의 미코얀 부총리와 중국의 국방부장 팽덕회가 입석한 가운데 노동당 중앙위 9월 전원회의가 열렸으며 여기에서 김일성은 8월 전원회의 결정이 성급하였음을 인정하고 박창옥, 윤공흠 등을 복당시켰다.

그러나 미코얀과 팽덕회가 떠나자 김일성은 더욱 본격적으로 반대파 척결 사업을 추진했다. ‘8월 종파사건’ 주모자와 연루자를 색출하고, 당증 교환사업을 벌여 사상을 점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최창익, 박창옥을 비롯해 김두봉, 오기성 등의 반대파는 모두 현직에서 추방되었다.

1956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숙청작업은 마무리되었다. 이에 따라 발전전략논쟁도 막을 내렸다. 따라서 이 회의를 계기로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발전, 경공업·농업 동시발전’이라는 자신의 발전전략을 관철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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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중국에서 조선의용군을 이끌었던 연안파 거두 김두봉, 김두봉도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다
◇김일성, 주민 3대 계층으로 분류

또 6·25전쟁 직후는 북한의 사회계층이 노동자, 농민, 사무원으로 단순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본격적인 계층 성분분류 작업을 자신의 직계인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 1파 독재를 시작하면서 추진했다.

이것은 1930년대 스탈린시대와는 달리 주민을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 등으로 3분하는 사업이었다. 3계층으로부터 떨어지는 자를 수용하는 감시층도 따로 분류한 것은 물론이다.

김일성 1인독재는 1960년대 후반 소위 ‘갑산파’를 숙청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 숙청은 스탈린 1934년에 감행한 스탈린파 숙청과 같이 깊이와 폭, 길이가 한정이 없었다.

김정일은 이 때부터 김일성의 당원 숙청을 본격적으로 체득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후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과 반대로 개인우상화를 단행했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과 같은 사후 몰락을 회피하려고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드는데도 공을 들였다. 김정일은 1974년에 후계수령이 되었다.

김정일은 이 무렵 ‘사상·기술·문화의 3대혁명 소조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사상이 이 운동의 중심이었는데 김일성·김정일 유일사상체계, 유일지도체제에 장애가 되는 인물은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운동이었다. 이 숙청이 하도 악착같아서 ‘간부 공황’이라는 말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이는 현재 공포정치를 진행하고 있는 김정은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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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오른쪽)은 30년이라는 오랜 기간의 후계자 수업과 실질적인 권력승계를 통해 김일성(왼쪽)을 우상화, 신격화 하는데 가장 큰 업적을 세워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화하였다.
◇70년대 북한, 3계층 51출신성분 확정, 끊임 없는 점검, 사상검열

1970년대는 북한에서 ‘3계층 51출신성분’이 확정된 시기였다. 북한주민은 3대 조상까지 출신성분과 현존 친인척의 사상동향, 월남자 유무 등으로 기계적으로 성분이 결정되었다. 여기서 주민의 성분이 끊임없이 재점검되고 사상을 척도로 항상 검열당하는 폭압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김일성의 이러한 숙청은 김정일에게도 그래도 이어졌다. 김정일은 1974년 이후 당의 사상·조직 부문을 담당하여 일관되게 후계수령 자리에 앉아 있었다. 김일성 세습 독재 체제라는 것은 반대하는 인물은 북한에서 말살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야 하는 체제다.

이러한 시대는 사실 1974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80년에 있었던 노동당 제6차대회부터다. 이 때 김정일은 당중앙위원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5명 중 제4위, 정치국 위원 19명 중 제4위, 비서국 10명 중 제2위, 군사위원회 19명중 제2위가 되었다.

김일성은 당중앙위원회의 이러한 기구들에서 언제나 1위였다. 때로 2위를 차지한 김일은 1984년에 오진우는 1995년에 죽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김일성이 죽고 3년상 종료를 선언하고 자신이 당총비서가 될 때까지 사실상 1인독재였는데도 김일성 시대의 권력서열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김정일은 이 기간 내부적으로는 식량부족을 역이용하여 일부 핵심계층에 대한 식량공급을 중단하고 동요계층과 적대계층에 대한 배급차별을 강화하여 반대분자와 그 가족을 조용히 제거했다. 그는 당의 권좌에 앉기까지 몸조심을 하면서도 암암리에 숙청을 지속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김일성, 김정일의 숙청은 3대인 김정은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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