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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어떻게 유일권력자가 되었을까?

김일성은 어떻게 유일권력자가 되었을까?

기사승인 2015. 11. 09.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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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파, 연안파, 갑산파 차례차례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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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9일 발족한 북한의 초대 내각. 앞줄 가운데가 김일성, 김일성의 왼쪽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오른쪽이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22편

북한에서 김일성이 가졌던 직위는 1946년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1948년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이었다. 그러다가 1972년 12월 개헌 이래로 국가주석이 되었다. 이 때부터 김일성의 지위는 조선노동당 총비서이며 국가주석,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며 동시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었다. 유일무이한 권력자인 셈이다. 공산국가의 집권자들은 당권과 정권, 군권을 독점하기 마련이지만 김일성만큼 유일무이한 권력자로서 장기집권하고 권력을 세습까지 한 경우는 사례가 없다.

그러면 김일성은 어떻게 이렇게 유일무이한 권력자가 될 수 있었을까? 물론 김일성을 처음부터 최고권력자가 되게끔 등장시켜 준 것은 소련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끝까지 소련의 뒷받침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그는 열심히 권력의 길을 향해 달렸다. 불철주야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써서 소련으로부터 단 한번 주어진 기회를 백배로 살린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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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가을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해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1945년 8·15 이후 김일성이 처음 북한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김일성의 전도는 소련군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어도 탄탄한 것이 아니었다. 고향인 평양을 기반으로 한 현준혁, 함경도를 기반으로 한 오기섭·주영하, 원산을 기반으로 한 이주하 등 쟁쟁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또 중국에서 돌아온 조선의용군사령 무정 등이 은밀히 서울의 재건조선공산당 중앙위원장 박헌영과 통하면서 김일성의 지도에 쉽게 복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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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왼쪽)과 소련파 거두 허가이(오른쪽), 김일성은 같은 소련파인 허가이를 1953년에 숙청한다.
◇소련, 국내 기반 없는 김일성 도우려고 소련파 북한 파견

소련은 북한 내에 기반이 전혀 없는 김일성을 돕기 위해 소련의 조선인자치주로부터 조선인 2세인 허가이, 박창옥, 태성수, 기석복, 김승화 등을 파견했다. 또 안길, 김책 등을 데려왔다.

이렇게 북한정권의 형성에는 크게 나누어 역사와 체질이 다른 3개 종파의 공산주의자들이 참가했다. 먼저 소련군이 데리고 온 △소련파(이는 다시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출신과 소련 2세파로 나뉜다)와 △중국 화북(華北)의 연안(延安)에서 중국공산당과 같이 싸운 연안파(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와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다.

세력으로는 국내파가 제일 컸고 다음이 연안파, 그리고 소련파가 제일 적었다. 그러나 소련파는 소련군의 일방적 비호 아래서 단시일 내로 급속히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것은 곧 김일성 세력의 신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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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노동당의 김일성(왼쪽)과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오른쪽)
그러나 이런 식의 세력 신장이 곧 각급 당부의 간부요원 확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1945년 8·15가 되기까지 적어도 20여년에 걸친 조선공산주의운동 역사가 있었다. 때문에 이런 투쟁경력에 맞춰 알맞게 간부가 배치되어야 했다. 경력으로 봐도 국내파가 으뜸이었다. 다음이 연안파였다. 소련파는 제일 마지막이었다. 결국 소련파는 국내파와 연안파에게 당과 행정기관의 간부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소련파는 여러모로 열세였고 내부에도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김일성이 속했던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출신과 ‘소련 2세파’가 일심동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 연안파와 연대해 국내파 제거

김일성은 치밀하게 반대파를 숙청해나갔다. 김일성은 여기서 비슷한 열세그룹과 연대하여 가장 강력한 상대를 선제공격하는 수법을 썼다. 김일성은 먼저 연안파와 연대하여 가장 큰 세력인 국내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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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라이벌로 암살당한 현준혁
김일성이 첫째로 실행한 것이 평양 지방 출신으로 김일성의 라이벌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북조선임시정치위원회 부위원장(위원장은 민족주의 진영의 대표인 조만식) 현준혁 암살이었다. 현준혁은 해방 직후 소련군의 치안 유지 아래 있었던 1945년 9월 28일 한낮, 평양시 중심가 평양시청 앞 노상에서 권총으로 저격 살해되었다.

김일성은 북한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선에서 오랫동안 대중과 생활을 함께 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대중의 지지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에서 시민생활을 해보지 않았다. 그냥 소련군대를 따라 와서 정권을 차지했기 때문에 정권을 유지하고 정적을 제압하려면 첫째도 무력, 둘째도 무력, 셋째도 무력이었다.

때문에 김일성은 군대 조직에 가장 힘을 들였다. 김일성은 인민군의 중요 부서에 자기 직계를 배치했다. 군의 최고 부서인 총참모장에는 안길, 그가 병사한 후에는 강건을 배치했다. 강건은 경상도 상주 출신이나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동했고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유격전투를 벌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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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북한에서 처음 만든 따발총을 인민군 고위 간부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용건, 김책, 김일, 김일성.
◇조선인민군에 직계 배치, 사병화

군대 내의 사상적 통제와 정치교육을 담당하는 문화부 사령관 및 민족보위성(국방부) 부상이라는 요직에는 김일을 배치했다. 김일은 김일성과 같은 평안도 출신이었다. 정주의 오산중학을 중퇴한 후 만주로 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김일성과 함께 유격전투에 참가했다. 김일성 직계 간부로는 최고의 학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 밖에 최현, 박성철, 오진우, 유경수 등을 군 지휘부에 배치해 군대 내에서 김일성파의 지도권을 확립했다. 그리고 인민군의 건군정신을 “김일성 장군의 애국적 무장항일유격 투쟁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김일성은 북한군을 자신의 사병으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김일성은 북한의 권력은 어느 정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현실로 보아 남북한이 평화적으로 통일된다고 하면 김일성은 정권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방 후의 남북한 추정 인구는 남한이 1800만인데 견주어 북한이 1200만 이하였다.

남북통일 총선거에서 ‘조국통일전선’이 추천한 입후보자들이 보수진영을 눌러 이긴다 해도 북조선노동당을 기반으로 하는 김일성은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공산이 컸다.

1948년 촉시를 기준으로 북조선노동당(김일성)과 남조선노동당(박헌영)의 세력을 비교해보면 수적으로 김일성이 박헌영보다 열세였다. 또 남조선노동당은 박헌영의 단일 지도 체제 아래 당내 파벌도 없이 단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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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른쪽이 연안파의 사령관 무정(武亭)이고 맨 왼쪽이 정율성. 연안파는 해방뒤 북한으로 들어간뒤 정치적 숙청을 당한다
◇북조선노동당, 김일성 직계·연안파·소련2세파·국내파로 나뉘어 대립

그러나 북조선노동당은 김일성이 무력으로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는 복잡했다. 김일성 직계파와 연안파(최창익, 김두봉, 무정, 박일우 등), 소련2세파(허가이, 박창옥, 김승화 등), 국내파(오기섭, 주영하 등) 등이 물과 기름처럼 대립하고 있었다. 특히 주목되는 현상은 북조선노동당 내의 국내파인 주영하와 오기섭, 연안파 내의 무정과 박일우가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과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또 남북한이 평화적으로 통일선거로 통일되었다면 남북노동당이 이승만, 한국민주당,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보수진영에 이긴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었다. 가령 좌익 진영이 선거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당 내에서나 국회 내에서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 세력이 김일성 세력보다 우세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평화적으로 한국이 통일되면 김일성은 최고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결국 2류나 3류 정치가로 도태되어 한국정계에서 밀려날 가능성도 있었다. 때문에 김일성이 확실히 통일한국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는 대화를 통한 평화적 통일이 아니라 자신의 사병이 된 조선인민군으로 무력통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6·25전쟁 전야 김일성이 처한 상황이었다.

6·25전쟁이 실패했음이 명백해지자 김일성은 1953년 봄에 박헌영, 이승화 등 국내파를 전쟁 패전 책임을 물어 숙청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허가이 등 소련 2세파도 제거했다.

1956년 여름에는 김두봉, 최창익 등 연안파를 숙청했다. 이리하여 경쟁세력이 될 만한 존재들을 숙청하고 나서도 김일성에게는 방심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이는 바로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의 처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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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갑산파 숙청

박금철은 박달과 더불어 함경남도 갑산군에 살면서 1937년 1월에 동북항일연군 제 6사장 김일성(북한의 김일성과는 동명이인, 함경남도 출신으로 1937년 11월 전사)과 접선하여 한인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는 등 보천보사건에 관련된 사람이다. 박금철은 보천보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살다가 해방 뒤 출옥했다.

이효순은 보천보사건으로 사형된 이제순의 동생이었다. 김일성이 박금철과 이효순을 중용한 것은 자신이 보천보전투의 주역이라고 위장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김일성은 이 두사람을 조선노동당부위원장 자리까지 앉혔다.

그러나 김일성은 1967년에 박금철과 이효순을 숙청했다. 당시 이 두 사람은 조선노동당 서열 4위, 5위였다. 죄목은 일제 스파이였다. 박금철과 이효순은 보천보전투와 이 전투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제6사장 김일성이 북한의 김일성과 다른 인물인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 두사람은 김일성의 거짓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의 숙청은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없는 집단에서 권력투쟁은 언제나 폭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또 이런 상황에서 승자는 항상 선제공격으로 상대를 단숨에 전멸시키는 방법을 쓴다. 북한의 김일성은 이 두가지 솜씨에서 탁원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의 과거 경력이 증명한다.

김일성은 14살 전후에 주마골(朱馬骨) 패에 끼어다니며 약탈을 일삼았고, 20살 전후에는 조선혁명군 소대장 고동뢰 일행을 참살한 바 있다. 또 동북항일연군 부대원으로서 여러 가지의 극좌 망동을 벌였고 1940년 이후부터는 소련으로 넘어가서 특무공작 훈련을 받았다.

◇김일성, 극심한 의심증으로 숙청 때마다 많은 희생자 내

이 모든 경력이 그의 뛰어난 능력을 시사한다. 김일성은 또 피해망상의 강박관념도 가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의 대원으로 있으면서 취약점을 선제공격하는 기습법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포위망을 좁혀드는 일본군에 다년간 쫓기면서 살았기 때문에 매사에 극심한 의심증과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이 몸에 밴 극심한 의심증과 경계심으로 말미암아 김일성은 거듭된 숙청 때마다 무고한 희생자를 수많이 냈다. 따라서 북한 주민들은 권력 앞에 겁에 질린 사람으로 위축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김일성이 유일권력자로 확립되는 것은 이같은 반대파 숙청만 갖고 이뤄진 것은 아니다. 집단창작팀이 써낸 ‘김일성항일무장투쟁사’가 여기서 큰 역할을 했다.


#1948년 초기 남북한 노동당의 세력 비교
김일성측
북조선노동당 당원수 약 100만명
중앙위원 67명
최고인민회의대의원 북한 선출 수 240명

박헌영측
남조선노동당 당원수 약 150만명
중앙위원 74명
최고인민회의대의원 남한 선출 수 36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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