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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3대세습 · 백두혈통 우상화 강행 5가지 이유

김정은 3대세습 · 백두혈통 우상화 강행 5가지 이유

기사승인 2015. 10. 2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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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혈통을 강조하기 위해 백두산 천지에 오른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21편

북한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가계를 우상화하고 권력 3대 세습을 강행하는 데는 물러설 수 없는 5가지 이유가 있다.

△일국 공산당 지도자로서 미미했던 창업주 김일성 경력 덮기 △가문을 중시하는 우리 국민의 전통적 심리 이용 △1970년대 이후부터 김정일로 승계, 2010년 이후는 김정은으로 세습 위해 △스탈린, 모택동 같은 김일성의 사후 격하 막기 위해 △그동안 북한이 저지른 철저한 근대사 날조를 은폐하기 위해서다.

이 시리즈에서 보았듯이 북한의 근대사는 철저히 날조의 역사다. 이는 조선 인민의 역사가 아니라 김일성의 역사요, 그 일가의 역사다.

북한의 경우는 1945년 김일성의 평양 등장시기부터 사실의 날조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사실대로의 김일성 경력으로는 도저히 그를 북한의 공산당 지도자로 내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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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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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방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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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
◇소련군이 최초로 김일성을 보천보전투 주역으로 날조

그래서 제일 먼저 북한 점령 소련군 당국이 김일성의 경력을 날조하기 시작했다. 이 소련군들은 최초로 북한의 김일성을 동북항일연군의 제6사장 김일성으로, 곧 보천보사건의 주인공으로 위장했다. 이것이 맨 처음 각본이었다.

뒤에 가서 김일성 집단은 이 기본 각본에서 한 술 더 떠 북한의 김일성을 조선인민혁명군 총사령 김일성으로 위장했지만, 위장의 원형은 어디까지나 소련제였다.

그러나 김일성의 경력은 아무리 위조해보아도 당시 쟁쟁했던 국내의 공산당 지도자들에 미치지 못했다. 특히 박헌영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지하 운동을 벌였는데 김일성은 그런 경력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북한은 증조부 등 선대들이 국내에서 반제항일투쟁을 벌였다고 날조하고 영웅화해서 김일성에 대한 후광효과로 삼았다.

두 번째 이유는 가문을 중시하는 우리 국민들의 전통적 사고와 심리적 경향을 이용한 것이었다. 특히 1970년대부터는 김정일 세습 집권을 노리고 가계의 우상화는 더욱 치밀해졌고 웅장해졌다. 2010년대 들어와서는 김정은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김정은은 외모와 사소한 행동까지도 할아버지 김일성을 모방하게 되었다. 마치 김일성이 스탈린을 모방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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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19일자 해방일보, 스탈린의 얼굴을 김일성보다 상석인 오른쪽에 배치한 편집이 눈에 띈다.
◇김일성은 스탈린을 모방하고, 김정은은 김일성을 모방하고

북한의 역사 날조 방식은 당면 시기의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서 과거의 역사를 뜯어고치는 것이 전형적인 수법이다. 가령 1960년대 들어와서 처음으로 주체사상을 선전할 때는 매사에서 김일성 일가는 ‘선구자’요 ‘창시자’였다.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도, 부친인 김형직도, 김일성도 다 선구자요 창시자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와서는 권력세습을 정당화해야 할 정치적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이 때부터는 방향을 수정했다. 김일성은 제 아버지 김형직의 가르침을 잘 지키고 그것을 실천하는데도 창의적이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바꾸었다.

이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김일성의 뒤를 이을 김정일이 김일성의 노선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못박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북한 김정은 정권도 당면 정치적 과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3대세습의 안정화다. 북한은 김정일로의 권력세습을 당연시하려고 과거의 역사를 대폭 뜯어고쳐 내놓은 것이 1979년과 1982년 사이에 나온 <조선전사>다.

북한은 정치적 목적에 최우선을 두고 과거의 역사를 시대상의 필요에 따라 뜯어고쳐왔다. 북한 정권의 존립 근거가 바로 이 날조된 김일성의 역사다. 이 거짓의 역사가 북한 내부의 주민들에게 알려지면 김일성 체제의 역사적 근거, 심리적 근거, 도덕적 근거가 모두 무너지게 된다. 권력을 세습하지 않으면 날조된 김일성의 역사가 탄로나기 때문에 북한정권은 더욱 필사적이고 결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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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식에 함께한 김정일·김정은 부자
◇세습집권은 공산주의에서는 범죄

북한은 사회주의 왕조라든가 봉건군주 전제제도라든가 따위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공산당의 최저강령은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다. 반봉건·반제 투쟁은 공산당 혁명 사업의 첫걸음이다. 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절대로 가지 못한다는 것이 공산당의 철칙이다.

공산당의 반봉건투쟁이란 가족주의·혈연주의를 반대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세습 집권은 반봉건투쟁주의자에게는 최악의 범죄다. 그러나 김일성의 조선노동당은 1970년대 들면서 세습집권 태세를 공표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의 최저강령도 지키지 못하는 봉건적이고 반계급적인 정당으로 타락했음을 전세계에 자인한 셈이다. 1970년대는 아직 전 세계에 공산국가가 많이 존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전세계로부터 비난이 평양으로 쏠렸다.

그러나 김일성에게는 이런 비난을 무릅써야 할 말 못할 속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권력세습의 4번째 이유인 사후 격하를 막기 위해서였다. 절세의 영웅으로 추앙받아온 김일성은 죽은 후에 최고의 반역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김일성은 자신을 북한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스탈린이 사후에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똑똑히 지켜보았다. 1953년에 스탈린이 죽자 3년 후에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의 충직한 부하였던 후루시초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당 중앙위원회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신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개인숭배와 특정의 활동가를 기적을 낳은 영웅으로 숭앙하고 당과 인민 대중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그 창조적 적극성을 약화하는 개인숭배에 단호히 반대했다. … 우리의 당과 인터내셔널에는 이런 말이 있다. 누구도 우리를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 신도 황제도 영웅도. 우리는 우리들 손으로 해방을 쟁취할 것이다’


당 창건 기념일 앞두고 만수대 언덕 찾은 北 주민들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지난 9일 평양 만수대 언덕에서 다수의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상을 찾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혜산시에 건립된 김일성·김정일 부자 동상
혜산시에 건립된 김일성·김정일 부자 동상
◇스탈린, 사후에 개인숭배와 반대파 숙청 혐의로 부관참시

이것이 스탈린의 개인숭배에 대한 최초의 공격 화살이었다. 이후 5년이 지난 1961년 소련공산당 제22차 대회에서 스탈린은 단죄를 받았다. 기적을 낳은 영웅으로 행세했던 과오와 인민대중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건설 성과를 개인의 창조적 업적으로 가로챈 개인숭배 강요와 무고한 사람을 스파이로 인민의 적으로 몰아 숙청했던 죄과를 받은 것이다. 그 결과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사람들은 명예회복되고 스탈린의 관은 레닌묘로부터 철거당했다.

김일성의 우상화는 스탈린에 비하면 비길 바가 아니다. 그는 모래알로 쌀을 만들고, 솔잎으로 배를 만드는 신통력을 가진 초인격적 존재로까지 신격화되어 있다. 심지어 김일성은 1945년 8·15해방이 자신의 항일투쟁 덕택이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또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숱한 정치적 살인을 저질렀다. 스파이다. 인민의 적이다 하는 것은 스탈린의 수법 그대로다. 일제 하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지하활동을 했던 숱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김일성에 의해 살해됐다. 미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한 박헌영이 대표적 예다.

또 중국 연안의 동굴 속에서 중국공산당과 더불어 숱한 항일 투쟁을 벌였던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김일성에 의해 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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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왼쪽)과 박헌영(오른쪽), 김일성은 한국전쟁 뒤 박헌영을 미제의 간첩이라고 총살했다.
◇북한주민과 탈북자, 김일성의 정적 숙청 전혀 몰라

그러나 이런 사실은 북한의 세대만이 전혀 모르도록 교육되어 있다. 현재 한국에 온 3만여명의 탈북자들도 이런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생전의 김일성은 스탈린과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으려고 대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도 모택동도 정적에 의해 매도되고 격하된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충직했던 동지요 부하들이 그렇게 했다. 김일성은 그래서 혈육인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해서 사후의 단죄와 부관참시를 면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김정은에게 권력을 세습한 김정일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살펴본 4가지 이유만 들더라도 김정은 정권이 가계를 우상화하고 세습집권을 계속해야 할 필요는 명백하다. 하지만 백두혈통의 창시자 김일성에게는 기어코 세습집권으로 가야할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의 날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그 어떤 폭군도 지도자도 자기 경력을 거의 100% 날조하고 남의 투쟁 경력을 자신의 투쟁경력으로 하고 자기의 집안 역사를 완전히 날조한 예는 없었다.

이 사실이 세상에 특히 북한 내부에서 폭로되면 김일성은 민족반역자로서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배신자, 전세계 공산당의 적으로 낙인 찍힐 것이다. 아무리 공산주의자라도 나름대로 최소한의 도덕과 성실과 의리가 있어야 한다. 동지를 아끼고 사랑하며 혁명전선에서 희생된 전우를 기념하고 혁명과 건설에 이바지한 공로의 서열을 존중하는 등이 최소한의 그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에게는 이런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과거의 역사를 날조하면서 이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전통을 짓밟아 버렸다. 또 이 날조된 역사를 지키기 위해 자기의 절대적 권력 유지와 세습정권 구축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북한 김정은, 당 창건 70주년 맞아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인 지난 10일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사진=연합뉴스
◇대한민국 역사교과서도 날조된 김일성항일무장투쟁사 서술해

그런데 현재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대한민국 내부의 역사교과서에 이 날조된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사’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역사교과서는 이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사’가 완전히 날조라는 사실을 제대로 서술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사실인양 애매모호하게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 국민들은 북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가 날조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더욱이 북한 동포들은 그것이 진실의 역사인 줄 알고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탈북동포들까지 이런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 탈북 동포 대다수는 비록 김정일, 김정은이 잘못해서 북한이 살기 힘든 사회가 되었지만 김일성 시대에는 아주 훌륭한 사회였고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에 민족사의 정통성이 있다고 믿고 있다.

남북한의 국민들이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북한 내부에서는 당이 가르치는 것을 무조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체제다. 거듭되는 교육·선전·학습·교양·운동을 통해 당의 가르침은 절대로 옳다는 신앙이 생기게끔 하는 것이 북한의 방법이다. 동시에 북한은 전 세계를 향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를 선전하고 자랑하며 광고한다. 이를 위해 북한은 숱한 돈을 쓰며 전력을 붓는다.

이런 상황이니 대한민국은 역사를 세계로 향해 제대로 홍보하지 못하는 처지에서 외국인이나 재외동포들은 북한의 일방적 선전만 믿게 된다. 지난해 국내에서 친북성향의 전국순회 토크쇼를 하고 다녔던 재미동포 신은미씨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 참석한 김정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비서가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 참석했다고 조선중앙통이 보도했다./사진=연합뉴스
◇우리 역사학계, 북한의 근대사 날조 비판 없이 수용 많아

북한이 우리의 근대사를 마음대로 날조하고 또 외국에 선전할 수 있었던 데는 북한 탓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잘못도 없지 않다. 북한의 근대사 날조는 해방 직후부터 시작되어 거듭거듭 커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 때 그 때마다 역사적 사실을 들어 북한의 날조를 낱낱이 분쇄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여기서 가장 심각한 영역이 항일독립운동사다. 우리 역사학계가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다보니 이 틈새를 김일성 집단이 파고들어 있지도 않았던 ‘김일성항일무장투쟁사’를 거대하게 창작해놓고 기정사실로 밀어붙이고 있다.

이 구도를 밀어붙인 것이 북한은 항일빨치산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이고 남한은 미제를 등에 업은 친일파들이 세운 나라라는 등식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들도 이런 구도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교과서가 대다수다.



#북한 권력 승계 일지
1950년 김일성 군사위원회 위원장
1966년 김일성 당 중앙위 총비서
1980년 김정일 당 중앙위 선전선동위 비서
1991년 김정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1994년 김일성 사망,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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