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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식홍재형 007작전...IMF사태, 실명제 때문인가

이경식홍재형 007작전...IMF사태, 실명제 때문인가

기사승인 2012. 05. 1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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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광원의 머니임팩트(제66회) - 업치락뒤치락 금융실명제(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공약이던 실명제를 대통령 긴급명령 형식으로 전격 단행했다. 사진은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김 전 대통령.


아시아투데이 윤광원 기자 = 
그렇게 꺼진 불로만 여겨졌던 실명제는 차기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공약으로 부활한다.


그리고 1993년 8월 12일 저녁, 대통령 긴급 재정경제명령 제16호로 금융실명제 실시가 전격적으로 발표된다.


김 대통령은 그날 저녁 9시 특별담화문을 통해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했다.


또 "금융실명제는 '신한국 건설'을 위해 가장 중요한 '개혁 중의 개혁'이며, 개혁의 중추이자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된 실명제를 두고, 당시 언론은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고 평했다.


박관용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 따르면, 당시 이경식 부총리와 홍재형 재무장관은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실명제가 언젠가는 실시될 것으로 보고, 부하직원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01년 10월 〈일요신문〉)


김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모임 등에서 개혁 얘기만 나오면, YS는 실명제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을 물었다. 국민들의 반응을 챙긴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실시를 최종 결심한 것이 1993년 6월 29일 이 부총리와의 화요일 정례 독대 자리에서였다. 이 부총리가 대통령의 결단을 이끌어낸 것인데, 다음은 이 부총리의 얘기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실명제 실시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세론이 분분했다. 실명제라는 시한폭탄을 안고서는 경제고 뭐고 운영할 수 없으며, 따라서 조기실시론이 평소의 내 소신이었다.


경제기획원장관에 임명되자 곧 기획원, 재무부, 한국은행, 한국개발연구원(KDI)로부터 실명제에 대한 보고를 비밀리에 받았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낼 것인지 고심했다" (김흥기 《경제기획원 33년 영욕의 한국경제》)


6월 29일 정례 독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이 부총리는 YS에게 불쑥 물었다. "각하, 실명제는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말이야. 누구하고 터놓고 의논하지도 못하겠고, 하기는 해야겠는데 큰 고민이야"


YS의 의중을 파악한 그는 평소 지론인 조기실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YS는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물은 후,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조기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실시하자"


사무실에 돌아온 이 부총리는 자문관 양수길 박사를 불러, KDI 남상우 박사와 함께 실명제 실시안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양 박사에게 매일 보고를 받고 작업지시를 했으며, 저녁에는 이 부총리의 집에서 3인 공동으로 3회 정도 보고를 받았다.


7월 8일 이 부총리는 YS에게 실명거래 의무화 실시방안을 보고했다. YS는 거의 수정 없이 받아들여 계획대로 추진할 것을 지시하고, 다시 한번 보안에 대한 엄명을 내렸다.


양 박사는 삼성동에 비밀작업용 사무실을 구했다. 이 부총리는 홍재형 재무장관과 의논해 김용진 세제실장, 김진표 국장, 진동수 과장 등으로 재무부 작업팀을 구성하고 과천에도 비밀사무실을 얻어 작업에 참여시켰다.


두 팀의 협력작업을 이 부총리와 홍 장관이 삼성동 사무실에서 검토했다.


7월 28일 두 사람은 기본추진계획, 인력동원계획, 홍보교육계획, 비밀보장 강화방안, 부작용에 대한 대안, 대통령특별담화 요지 등을 상세히 보고했다. YS는 건의안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담화문에 대해서는 일일이 구술하는 식으로 지시했다.


드디어 작업이 완료됐다. 8월 9일 오전 10시 이 부총리와 홍 장관은 준비된 법령제안, 부작용대안, 대통령특별담화문, 시행일 검토의견, 시행 당일의 일정 등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렇게 문민정부의 가장 무거운 과제였던 실명제가 역사적인 시행에 들어간 것이다.


1982년과 1990년 두 차례의 무산 사례를 의식한 YS는 당시만 해도 높았던 국민지지를 등에 업고, 철저한 비밀작업 끝에 대통령 긴급명령 형식으로 그야말로 기습적으로 단행했다.


1982년 실명제 도입에 실패했던 강경식씨는 1993년 당시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YS정권의 실명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982년 '73조치를 대통령 긴급조치로 했으면 성공했을 텐데' 라고 후회를 많이 했다. 그 때는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조치는 많이 토론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길을 밟았다가, 두 번의 실명제 추진이 다 실패했다.


이번에도 국회에서 입법절차를 밟았더라면 심의과정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실패했을 것이다. 긴급명령으로 실명제를 실시한 것은 잘한 일이다.


1982년 공평과세 차원에서 추진한 것보다는 훨씬 강한 내용이다. 여기에는 경제개혁은 물론, 사회정의 실현 차원에서 실명제를 실시하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의지가 담겨있다"


그는 "법인세와 소득세를 현실에 맞게 대폭 인하하지 않으면, 세 부담이 증폭된 기업가나 개인사업자들이 세금추적을 피하기 위해 금융기관을 이용하지 않아, 또 다른 지하경제를 형성할 가능성이 있다"는 쓴 소리도 했다.


"당시 실명제를 둘러싸고 경제부처 공무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란은 비유법으로 진행됐다. 고위 관료들이 김 대통령의 경제실력을 감안해,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통해 설명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외과수술론, 목욕탕수리론, 뒤주론이다"(위 〈일요신문〉)


외과수술론은 당시 박재윤 청와대 경제수석의 지론이다. 환자를 수술하려면 일단 몸을 회복시켜놓고 하듯이, 경제사회전반에 엄청난 충격이 되는 실명제는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된 뒤 하자는, 일종의 연기론이다.


반면 목욕탕수리론은 재무부 김용진 세제실장의 주장으로, 외과수술론과 반대 개념이다. 목욕탕 수리는 손님이 적은 여름철에 하듯이, 실명제 같은 충격적 조치는 경제가 나쁠 때 해야 별로 잃을 것이 없다는 것으로, 실명제 조기 단행의 논리적 근거가 됐다.


또 뒤주론은 홍 재무장관의 논리였다. 뒤주의 쌀을 둥근 바가지로 퍼내면 네 귀퉁이에 쌀이 조금씩 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명제도 법망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조금은 남겨둬야 한다는 얘기다. 본래 돈이란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고, 모든 것을 속속들이 까발리는 것은 부작용이 너무 많다는 것.


"그런데 뒤주 속을 빗자루로 구석구석 깨끗이 쓸어내고 싶어했던 YS의 욕심이 문제였다"고 방송작가 김문영씨는 위 〈일요신문〉 기사에서 지적한다.


금융실명제의 성과를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내 주는 지표는 실명확인 및 실명전환에 대한 통계인데, 1997년 3월까지 금융기관의 실명확인율은 99.3%로 실명전환 대상금액 총 405조5000억원 가운데 402조7000억원이 실명 확인됐다.


가명 또는 무기명예금의 실명전환율도 98.8%에 달했다. 총 대상금액 2조8417억원 가운데 2조8075억원이 실명전환을 마쳤다.


일단 제도적으로 금융기관을 경유하는 모든 금융거래에서 실명사용을 의무화한 조치는 자금이동이나 출처에 대한 조사의 위험을 가중시켜, 각종 음성적 거래를 위축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충격적 조치로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 큰 충격파가 된 것도 분명하다.


이한구 당시 대우경제연구소장(현 새누리당 원내총무)은 "실명제의 근본취지인 지하경제 양성화와 과표양성화 등에서 뚜렷한 개선효과는 미흡하고, 실명제 실시와 함께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됐던 중소기업과 영세상인에 대한 대책이 단기적 자금지원 등 임시방편적 조치만 이뤄졌을 뿐, 관련 금융제도의 개선이나 세금감면 등 보다 근원적인 문제해결에는 미흡하다"고 비판했다.


금융실명제 단행이 사채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실명제 시행초기 언론에서는 "명동사채시장 그 막을 내리다"와 같은 성급한 기사를 양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채업자들은 이런 기사들을 비웃었다.


"검은 돈의 생리는 높은 이율과 세금기피가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리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최우선은 자금을 노출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금융실명제를 하니 사채시장에 자금이 나올 리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사채금리는 자꾸 오를 수밖에.


중소기업들은 급하면 사채시장을 찾는데, 금융실명제 실시로 일시에 자금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쉽사리 자금이 나올 리 없는 것이다. 사채시장은 돈 시장인데, 시장에 돈이 없으니 돈 구할 방법이 없고, 그러니 중소기업의 부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문영, 《사채업자가 말하는 사채이야기》)


당시 명동에서만 하루에 수백 억 원씩 거래되던 어음할인 자금이 일시에 숨어버리고, 금융기관 대출시 수십 억 원씩 동원되던 조성자금도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기업들은 다급한 나머지 어음끼리의 '박치기', '쪼개기' 등의 신종 방법으로 자금갈증을 해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자금용 양도성예금증서(CD)나 가명, 차명계좌 예금을 20~30%의 수수료를 지급하고도 넘긴다는 소문이 사채시장에 퍼지자, 검은 돈들은 다시 어둠 속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사채전문가인 오문영씨는 "금융실명제가 사채시장에 미친 영향은 일시적인 마비증세를 가져오며, 일부 노출된 자금 외에 숨겨진 검은 돈을 더욱 깊숙이 숨도록 했다. 그러나 공개된 시장이 아니고 무형의 시장인 사채시장의 속성상, 다시 물밑거래를 하기 위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실명제 이전보다 돈을 숨기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사채업자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낼 것이며, 1972년 83조치나 1982년 장영자 사건과 같이, 아마 10년 후쯤 되면 실명제도 하나의 얘깃거리에 불과할 뿐, 사채시장이 거래하는 데 별다른 장애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YS의 금융실명제에 대해 1982년 판 실명제의 실무자 강만수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1982년 실명제를 처음 추진할 때나 지금이나, 실명제는 법으로 강제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원래부터 실명을 쓰는 99% 정도의 사람들까지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게 하고, 법으로 다스릴 필요는 없다. 범죄를 수사하기 위해서는 거액의 현찰거래나 외환거래에 대한 자금세탁방지법으로 충분하다.


관행은 관행으로 고쳐야 하고 금융단 협정으로 충분하다. 더구나 신용사회가 되면 신용의 축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실명을 사용한다. 긴급명령까지 왜 필요했을까"


재임시 실명제를 유보시켰던 노 전대통령도 후임자인 YS의 실명제에 대해 비판적이다.


"실명제의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IMF사태 이후 종합소득세는 경제여건을 감안한다는 명분 아래 연기됐고, 실명제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실명제는 세정상 종합소득세의 예금이자에 대한 확대과정을 통해 얼마든지 실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자금흐름에 갑작스러운 변동을 가져올 때, 평온한 경제상황에 왜곡을 초래하여 경제에 부정적 효과를 야기한다. 이것이 오히려 저소득층에 경제적으로 불리한 여건을 초래하므로, 경제정의에 배치되는 결과를 낳는 것이 현실이다"(조갑제,《노태우 육성회고록》)


이 인터뷰에 배석했던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경제정책을 긴급조치 형식으로 실시해서도 안 되지만, 그런 조치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김영삼 정권에서 급작스럽게 긴급조치로 실명제를 실시하는 바람에, 자금흐름의 왜곡현상을 야기했다. 사채시장에 의존했던 중소기업이 실명제로 자금줄이 막히자 부도사태가 연발했고, 그 여파가 IMF사태로 이어졌다.


정부가 개개인의 예금 재산을 들여다보고, 돈이 많은 사람에게 돈을 빼앗아 저소득층에 주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면서 추진됐기 때문에, 실명제에 대한 허상이 생겨났다. 그 결과 '국민의 80~90%가 지지하는데 왜 실명제 실시를 안 하느냐'하는 항의가 제기된 것이다.


결국 김영삼 정부가 여론몰이 식으로 실명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실효를 못 거두고 아무 의미도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실명제가 최초 거론될 당시 사회분위기가 장영자 사건으로 뒤숭숭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뇌리에 실명제는 정의구현을 위한 방법이라고 인식된 부분이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실명제는 원래 세금징수의 편의성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일본의 실명제 격인 그린카드 시스템도 당시 대장성의 세제국장이 '종합소득세를 위해 필요하다'고 해서 도입했다. 우리는 종합소득세를 점진적으로 확대 발전시키면 굳이 실명제를 할 필요가 없는 데도,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만든 것이다.


경제정책을 심오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순탄한 상황에서 경제의 흐름을 크게 뒤바꾸는 정책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


즉 노태우와 김종인 이 두 사람은 실명제와 경제정의는 별 관련이 없으며, 공연히 경제상황만 악화시켜 결국 IMF의 원인이 됐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셈이다.


이런 논리가 먹혀들면서, 1997년 12월 전경련은 실명제를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했고, 실명제 보완 또는 폐지논쟁은 15대 대선의 핵심 이슈 중 하나로 부상했다. 주요 대통령 후보들도 이를 수용, 금융소득종합과세 유보 등 실명제의 골격이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하지만 실명제는 이미 그 해 3월 한 차례 보완된 바 있었다.


1982년 7월 실명제 얘기를 처음 공식화했던 강경식씨가, 15년 후 김영삼 정권의 마지막 부총리로 실명제의 보완대책을 마련한 것은 역사의 우연일까 필연일까?


그가 1997년 3월 5일 개각발표 후 후임 부총리로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무심코 "실명제는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답변한 것이 언론의 초점이 됐다.


"금융실명제는 김영삼 대통령이 자신의 최대 치적으로 여기고 있는 사안이었다. 대통령 긴급명령 형태로 돼있는 것을 정상적으로 입법화하자고 해도 '한자도 고쳐서는 안 된다'라고 해서, 당시의 상황에서는 금융실명제를 보완하겠다는 말은 금기에 속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지도 않게 내가 '고양이목에 방울을 다는 쥐' 꼴이 되고 만 셈이었다. 


임명장을 받기도 전에 김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리는 실명제 보완의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게 돼버렸다. 금융실명제를 처음 제안한 나로서는 일종의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할 수 있었다"(강경식, 《강경식의 환란일기》)


3월 17일 김 대통령에게 첫 보고를 들어간 강 부총리는 금융실명제 보완문제에 대한 보고를 했다. YS는 별로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보완내용의 골자는 금융실명거래에 대한 국세청 통보는 종합과세에 필요한 범위 내로 한정하고, 모든 금융거래에서 소득세 최고세율(40%)로 분리과세를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금융거래내용의 노출은 세수를 위한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지하자금의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중소기업 등을 지원하는 경우는 과징금 부과 대신 자금출처조사 면제 등이었다.


신한국당 김중위 정책위의장, 이강두 정책실장에 이어 이회창 대표에게도 내용을 설명했는데, 다들 잘됐다는 얘기였다. 18일 오후 기자실에서 실명제 보완방향에 대해 발표했다.


그러나 양쪽에서 불만이 쏟아졌다. 완화론자들은 "그게 무슨 보완이냐"며 불만이었고, 강화론자들은 실명제 후퇴로 받아들였다.


"금융실명제가 완전히 정착된 사회를 하루아침에 만들 수는 없다. 실명제가 정착되려면 사회전체의 기능이 먼저 정상화돼 있어야 한다. 굳이 법이 없더라도 완벽하게 실명제가 지켜지고 있는 외국의 경우도 많지 않은가.


실명제 보완작업을 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네모난 뒤주의 쌀을 둥근 바가지로 퍼내듯 해야 한다'는 옛 성현의 말을 되새기게 됐다. 여유를 남겨둬야 한다는 말이다.


완전무결하게 빈틈없이 하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국에서는 개인이나 중소기업들이 소규모로 탈세를 하는 경우, 국세청에서 이를 알면서도 그냥 두고 지켜본다고 한다. 그물코를 성글게 해놓더라도, 고기가 작을 때는 빠져나갈 수 있지만 몸집이 커지면 자연 걸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위 《강경식의 환란일기》)


그 역시도 실명제가 반드시 강행됐어야만 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데 동의한 셈이다.


이에 대해 김흥기 씨는 "금융실명제의 보완 내지 폐지를 요구하는 주장들 대부분은 경제악화를 핑계 대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경제의 투명성 확보 면에서 매우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고 논평했다. (위 《경제기획원 33년 영욕의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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