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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립다큐 ‘B급 며느리’와 ‘B급 극장’에서의 단상

[칼럼] 독립다큐 ‘B급 며느리’와 ‘B급 극장’에서의 단상

기사승인 2018. 02. 2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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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교수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
독립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의 주인공인 극 중 며느리는 평범한 듯 특별하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분명 ‘똘기’가 있어 보인다.

우선 B급이라고 하면 정서적으로 마이너리티로서 자본과 거리를 둔 독립영화나 인디음악 혹은 저항 이미지의 랩과 힙합 등을 떠올리게 한다. B급이라는 표현은, 배급이라는 영화 특유의 유통방식을 극대화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신진배우와 감독을 등용할 기회를 마련할 목적으로 A·B급을 나누어 제작했던 할리우드시스템의 용어가 ‘서브컬처’의 정서를 대변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바뀐 것이다. B급 정서를 우리말로 표현하면 ‘똘기’라고 할 수 있겠다. 순수 우리말로서 똘기의 사전적 의미는 아직 채 익지 않은 과일을 의미한다. 바로 풋과일을 뜻한다. 그러나 관용적으로 설익은 어설픔보다는 젊음이 부릴 수 있는 오기나 당참의 의미가 더 강한 듯하다.

결혼 전에 키우던 고양이를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버려야 한다’는 시어머니의 주문에 끝까지 맞서고, 자신의 어린 아들에 대한 시부모의 넘치는 애착도 무시하기 일쑤다. 단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며느리인 그녀도 인정하듯이 딱히 그리 못된 시부모도 아니다. 오히려 인내하는 쪽은 시부모님들인 것처럼 보인다.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극 중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인 그녀의 남편은 전형적인 고부갈등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는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어찌하지 못하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고부갈등은 봉합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보고 있으면 측은하기 그지없다.

주인공인 화자의 아내는 좀처럼 타협할 기세가 아니다. 그녀는 후대에 자신의 평전이 써질 것이라며, ‘시어머니’ 아니 ‘대한민국 시댁문화’와 투쟁하는 자신의 정당성을 확신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인종차별 항거의 상징인 ‘로자 파크스’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이 땅의 며느리들에게 부당한 시댁 요구에 항거할 것을 요구한다. 또 대한민국의 많은 며느리들이 극장에 와서 자신의 투쟁을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가 극장을 찾았을 때 특이했던 점은 관객석에는 다수의 여성 노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한 독립 다큐멘터리라 우연히 극장이 들렀다가 시간을 때우려고 이 영화를 본 것은 아닐 텐데, 젊은이들보다는 노인들이 많은 것은 평소 독립영화상영관의 분위기와는 상충됐다. 물론 이것은 우연일 수 있다. 어쩌다 필자가 간 시간에 나이 든 여성관객들이 많았을 수 있다.

어찌했던 바로 그 시간에는 극 중 시어머니와 감정이입할 수 있는, 좀 더 구체적으로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많이 관람하고 있었다. 작은 극장 안 군데군데 끼리끼리 앉은 노인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한숨, 야유, 탄식 등이 헛웃음 비슷한 것과 같이 섞여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다른 집 며느리의 시댁 투쟁기를 구경하면서 극중 시어머니와 감정적인 유대를 유지한 채 나이든 그녀들은 분명 젊은 그녀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필자의 눈에 들어온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관객으로서 시어머니들은 극 중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감정의 동화가 전이되고 있는 듯하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에겐 다큐멘터리 내러티브의 연장선상에서 스크린 밖으로 이어지는 관객석의 풍경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리얼리티를 리얼리즘이 못 이긴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싶었다. 리얼리즘 장르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가 극장의 관객석에서 펼쳐지는 리얼리티 앞으로 삼투압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삼투압 과정을 통해 리얼리티 드라마의 리얼리즘을 넘어 리얼리티로서 그녀들은 극 중 며느리를 스크린 밖으로 불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관객석 중간쯤 그 시어머니들과 극 중 며느리는 조우하고 있었고, 나이든 그녀들은 이제 시어머니가 아니고 이미 며느리와 동화돼 있었다. 그들은 점점 젊어지고 어려지고 있었다.

이청준 소설 원작의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 ‘축제’에서는 텍스트 안의 또 하나의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주인공 준섭이 직접 쓴 동화 ‘할미꽃 당신’이 나온다. 극중 작가인 주인공이 돌아가신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자신의 딸에게 읽어준 바로 그 동화에서, 할머니는 젊어지고 작아지고 어려지고 급기야 간난 아기가 돼 간다. 주인공 준섭은 그렇게 딸아이에게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돌아가신 이유를 설명한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살다 떠나신 것”이라고…. 준섭은 할머니가 자손들에게 나눠준 키와 지혜만큼 작아지고 어려졌다가 사라진 거라고 딸아이에게 말해준다. 먹먹해 온 기억이 난다. 너무나도 문학적으로 자신의 어머니인 할머니의 노망과 죽음을 딸아이에게 전했다.

병명으로서 치매가 아니더라도 늙음은 삶의 무게만큼 그 눌림으로 인해 왜소해지고 작아져 가는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장 안의 그녀들도 누구의 할머니만큼, 누구의 엄마만큼, 누구의 아내만큼, 누구의 연인만큼, 누구누구의 단짝만큼, 누구와 누구의 소중한 아기만큼 작아지고 어려진다. 정오의 시간임에도 수은주는 영하 10도, 바람이 매섭게 차갑고 태양은 따갑던 어느 겨울날, 인생에서 그와 같은 날들을 몇 번이나 거쳤을지 세기도 아련한 노년의 평범한 여성들은 B급 극장에서 그렇게 B급 며느리를 보며 젊고 아름다운 시절의 자신들을 만나고 있었다. 수줍음으로 청춘의 똘기도 살짝 감춘 채, 처녀들은 풋풋한 아내이자 며느리였다가 이내 씩씩한 엄마가 된다. 커가는 아이만큼 왜소해지고 아이의 아이 만큼 작아져 태어나기 전으로 그렇게 돌아갈 준비를 한다.

늙음은 그렇게 소수자가 돼 가는 길이고, 때문에 어쩌면 공감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공감은 능력이다. 타고난 기질일 수도 있겠지만 삶의 경험으로 축적되는 자산이다. 사실 누가 누구의 입장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혹은 그녀가 아니면 진정 그 혹은 그녀가 될 수 없기에, 막연히 그가 혹은 그녀가 그럴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그 추정치가 근사치가 되기 위해서는 삶을 관통한 경험치가 중요한 요소이기에 적어도 공감 능력에 있어서 늙음은 매우 유리한 조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는 더 많다.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아마도 피해의식, 혹은 본전 생각 정도로 범주화되지 않을까?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거야’라든가 아니면 ‘내가 당한 만큼 너도 당해봐’ 이런 심리일 수 있겠다. 나이가 든다고 모두 다 능력이 배양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더 원색적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경제적인 이유! 할 말이 없다. 돈 문제로 그녀들이 변화와 실천의 정서로서 똘기를 숨겼던 것처럼, 경험으로 축척된 소중한 능력으로서 공감을 실천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많은 노인들의 노후가 보장되지 않는, 복지가 빠진 고령사회가 계속 지속된다면 누가 공감을 실천할 수 있을까? 1%의 A급이 아니면 99%가 B급인, 아니 D급인 양극화된 현대사회가 그런 기회를 앗아가지 않았는지 되묻고 싶다. 비약이 심한가?

B급 극장에서 독립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를 본 날, 생각의 가지를 솎아내지 못하고 이 생각 저 생각 단상의 끝을 쫓아가느라 숨이 고르지 않다. 어설프다 싶은데, 무언가 결론 내고 싶지 않은데, 자꾸 이유를 찾으려 든다. 이것도 ‘B급 정서’의 관성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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