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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타임’ 엄효섭 “악역 전문? 그래도 연기할 수 있어 좋아”[인터뷰]

‘골든타임’ 엄효섭 “악역 전문? 그래도 연기할 수 있어 좋아”[인터뷰]

기사승인 2012. 10. 0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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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염종 역 이름 알린 후 악역으로 승승장구, 연기 열정 '물씬'
골든타임 김민준 역 엄효섭 /사진=빌리지엔터테인먼트
아시아투데이 한상연 기자 = 안방극장에서 이제까지 봐온 배우 엄효섭의 이미지는 버려도 좋다.

MBC 월화드라마  '골든타임'(극본 최희라 연출 권석장, 이윤정)을 끝낸 엄효섭을 최근 서울 강남구 압구정 소재 한 카페에서 만났다. 눈앞에 마주한 그는 듣기 좋은 울림이 느껴지는 중저음의 목소리와 강한 느낌(?)의 외모 속에 은근히(?) 묻어나는 푸근한 인상을 지닌 중년의 형님 같은 배우였다.  그간 수많은 드라마에서 보여 온 얄밉고, 무서운 이미지는 드라마 속 연기였을 뿐이었다.

엄효섭은 최근 인기를 끈 '골든타임'에서 주인공 외상외과의 최인혁(이성민)을 괴롭히는 과장 4인방 중 일반외과장 김민준 역을 맡아 맹활약을 펼쳤다. 시청자들은 그의 도가 튼 특유의 얄미운 연기를 보며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최인혁을 괴롭히는 그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드라마 속에 주인공이 있으면 악역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골든타임'에는 악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인혁을 괴롭히는 얄미운 과장 4인방이 그런 역할이었죠. 특히 제가 외과의고 최인혁이 외상외과의다보니 직접적으로 부닥치는 부분이 많아서 더 부각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얄밉게 보였으면 연기를 잘 한 것 아닌가요?(웃음) 주인공이 저로 인해 더 돋보일 수 있었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그는 인터뷰 내내 극중 자신과 대립각을 세웠던 후배 이성민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엄효섭에게 "역시 멋있었다"고 했지만 "김민준은 제 인생에 있어서 기억에 남는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요"라는 말만 할 뿐, 이성민의 칭찬을 계속 이어 갔다.

"팔색조 매력을 가진 뛰어난 연기자예요. 후배지만 연기를 참 잘 해요. 이번 작품에서는 최인혁이라는 인물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자기화시키는 것을 보면서 '이 친구는 천생 배우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언젠가는 방송을 보고 이성민 씨에게 전화를 해서 '왜 이렇게 멋있냐? 뒷모습도 멋있더라'고 말했는데, 그 정도로 정말 연기를 잘 했죠."

엄효섭에게 이번 드라마는 혹독한 작품이었다. '골든타임'은 부산을 배경으로 올로케이션 촬영을 진행, 대부분의 배우와 제작진들이 부산 현지에 숙소를 마련하고 촬영에 매진해야 했다. 하지만 올로케이션 촬영보다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대본이 늦게 나와서 힘들었어요. 쪽대본이었지만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고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권석장 PD의 탁월한 연출력과 스태프들의 피나는 노력, 대단한 연기자들이 모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종방연 때 '이 조합이 다시 모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죠."


사진=빌리지엔터테인먼트
엄효섭의 말처럼 '골든타임'은 쪽대본의 연속이었다. 방송 분량이 모자라 어떤 회차는 평소 방송 시간보다 15분 적게 방영된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대본을 숙지할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을 터. 그랬기에 NG도 많았다고 그는 말한다.

"7회부터 책 대본을 받은 기억이 없었어요. 주인공들은 엄청 힘들었을 거예요. 아마 작가님에게 좋은 감정(?)이 있었던 배우들이 없었을지도…솔직히 이번 작품 하면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어요. 김민준은 과장 4인방 중에서도 인물 소개가 두 줄 밖에 안 되는 가장 비중이 작은 인물이었는데 작가님이 절 좋아 하셨나봐요.(웃음) 7회부터 대사가 엄청 늘어난 거예요. 그래서 NG를 많이 냈죠. 다른 분들은 '대본이 늦게 나와서 NG 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해주셨지만 배우로서 상처를 받았어요."

그럼에도 그가 지난 4월 종방한 JTBC 드라마 '신드롬'에 출연한 경험이 있었기에 의학드라마에 대한 부담감과 힘든 점은 적을 것이라 생각했다.

"쉽지는 않았어요. '신드롬'에서는 신경외과의로 나왔지만 수술을 하거나 전문 의학 용어를 쓰진 않고 대부분 다른 캐릭터들의 조언자 역할을 많이 했거든요. '골든타임'에서는 수술도 해야 했고, 전문 용어도 외워야 해서 오히려 더 힘들었어요. 특히 이번 드라마는 실제 의사분들이 대본 집필에 많은 도움을 주셨기 때문에 전문용어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배우 입장에서는 힘든 작품이었죠. 의사들의 평소 대화 내용을 담아내다보니 입에 안 맞는 대사도 많았고, 그래서 현장에서 고친 부분도 많았고요."

엄효섭은 '골든타임' 속 과장 4인방 중 단연 돋보였다. 가장 호전적이면서도 기회주의적인 성격이 한 몫 했겠지만,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4명 중 유독 엄효섭만이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구사하는 사투리에는 어색함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출신이 궁금했다.

"고향은 서울이에요. 예전에 대학로에서 연극을 할 때 부산 쪽 사투리를 쓰는 역할로 공연을 한 적이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배운 적이 있었어요. 권석장 PD가 과장 4인방 중에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것도 좋겠다는 말에 제가 한다고 했는데 제겐 독이 됐죠. 서울말로 나온 대본을 사투리로 바꿔서 해야 했으니까요. 초반에 걱정이 돼 경북 출신인 이성민 씨에게 '내 사투리 좀 어떠냐?'고 물었는데 '그 정도면 잘하는 거예요'라고 말해줘 용기를 얻었죠. 그래도 사투리를 어설프게 따라하면 안 되겠다 싶어 제 스타일대로 하되, 사투리의 느낌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했어요."

의학드라마의 꽃은 역시 수술 장면이다. 일반외과장 김민준 역 엄효섭 역시 몇 번의 수술 장면을 통해 '미친 존재감'을 선보였다.

"전 수술 장면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갑자기 긴 수술 장면 촬영이 잡힌 거예요. 수술 장면은 5~6시간씩 촬영하는 힘든 작업이었어요. 그런데 이성민 씨가 절 보고 놀리더라고요. 이성민 씨는 수술하는 장면이 대부분이었지만 전 아니었으니까요. 더욱이 수술실 세트장에는 에어컨도 안 틀어놔서 찜통인 데다 NG나면 옷과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아무튼 힘들었죠.(웃음)"


사진=빌리지엔터테인먼트
의사라는 평소 익숙하지 않은 역할에다 어려움이 많은 수술 장면을 연기하다보면 잊지 못 할 전문 용어나 에피소드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았다. 당시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는 엄효섭의 얼굴에는 연방 미소가 지어졌다. 

"유독 어레스트(심정지 상태)가 많이 나와서 기억에 남아요. 그 외에도 이리게이션(수술부위 세척), 석션(이물질 흡입)도 기억에 남는데 이리게이션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수술 중 이리게이션 할 때 큰 스포이드를 쓰거든요. 뒤에 달린 둥근 고무를 생각해 '이리게이션!'이라고 외치며 동시에 손을 고무 모양으로 오므린 거예요. 이성민 씨가 이 장면을 보고는 '이리게이션이 그게 뭐야'라고 놀려대더라고요. 저는 수술 장면은 처음이었으니까…참 당황했죠.(웃음)"

엄효섭은 이번 작품으로 '다시 한 번'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앞서 지난 2009년 큰 인기를 모았던 MBC '선덕여왕' 염종 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가 연기한 염종은 한 주군을 모시는 충복이면서도 어떤 일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간사함을 보이기도, 때로는 포악함까지 드러내며 결국 주인을 배신하는 다면적 인물이다. 그 당시 그의 연기를 보며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낀 시청자들이 많았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양면성이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죠. 그래서 배우라는 직업이 좋은 것 같아요. 내면에 숨겨져 있던 내 다른 모습을 고도의 집중력을 통해서 끄집어 내 즐기는 거니까요. 염종 역 역시 그래요. 카메라 앞에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즐겼죠. 제가 겸손한 게 아니라 작가님이 그 인물에 맞게 잘 써주시기도 했고요. 물론 저도 못 하진 않았지만…하하."

엄효섭이란 이름은 악역으로 많이 기억된다. '선덕여왕' 염종, '골든타임' 김민준, tvN 드라마 '인현왕후의 남자' 민암 등 유독 강한 역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역할들은 주연이 아닌 조연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인공위성을 구성하는 한낱 볼트에 지나지 않지만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며 자신의 연기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한때는 '이런 역할은 그만 해야겠다'라는 생각도 하긴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연극배우는 무대에 섰을 때, 드라마 배우는 카메라 앵글 앞에 섰을 때 배우죠. 그게 아니라면 백수죠. 어떤 역할이든 연기를 할 때면 그 순간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행복해요. 배역에 욕심을 내는 것은 배우에게는 사치죠."


사진=빌리지엔터테인먼트
이쯤 되면 '악역 조연'이란 꼬리표를 떼고 싶을 법 한데, 그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선역이든 악역이든 상관없이 그저 연기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당연히 멋있는 역할도 하고 싶죠. '골든타임'에서 최인혁 같은 역할도 하고 싶죠. 저라고 왜 안 하고 싶겠어요. 근데 최인혁은 제 역할이 아니었어요. 어떤 역할이 들어오든 최선을 다할 뿐이지 다른 역할에 욕심을 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저 제가 맡은 역할을 어떻게 하면 잘 소화할까를 고민할 뿐이죠."

그런 그도 여타 중년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연극 배우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잊지 않고 묵묵히 배우 인생을 걸어오다보니 지금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이 정도까지 생활할 수 있게 했던 것이 연극 무대에서의 활동이었죠. 연극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버티진 못 했을 거예요. 그 당시 힘들었던 생활이 바탕이 되다 보니까 쪽대본이 날아오더라도 참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웃음) 그래서 올해도 11월 7일부터 대학로에서 '쥐'라는 공연을 해요. 시간 내서 꼭 보러 오세요."

엄효섭은 오는 11월 7일부터 대학로 연극 활동 시절 함께 했던 윤제문, 고수희와 다시 한 무대에서 뭉친다. 공연을 앞둔 그도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 경험을 떠올리며 현재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 배우 생활을 이어가는 후배들에게 충고 한 마디를 건넸다.

"우공이산(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내가 하는 일을 묵묵히 하면 그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지금 시련과 좌절이 있어야 그게 토대가 돼 성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영화에서도 말쑥한 군인보다 온 몸에 상처가 나 있는 군인이 끝까지 살아남을 것 같잖아요. 온실 속에 화초처럼 지낸 말쑥한 군인은 꼭 죽더라니까요?(웃음)"

그에게 마지막으로 '배우란?'이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답은 젊고 어린 배우들에게는 듣기 어려운, 모진 풍파를 겪어낸 중년배우 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후배들에게 항상 '네 자신을 위해서도 연기를 하지만, 보는 관객들과 시청자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얘기해줘요.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단히 연습해야하고요. 최선을 다하고 혼신의 힘을 쏟아 연기를 했을 때 비로소 인정을 받는 것이지, 배우라고 허세만 부리면 남는 것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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