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kyo Nikikai Opera Theatre “Carmen” photo by Masahiko Tera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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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yo Nikikai Opera Theatre "Carmen" photo by Masahiko Terashi
도쿄 니키카이오페라(이하 니키카이)가 오페라 '카르멘'을 신작으로 선보였다. 지난 20일 일본 도쿄 우에노 문화회관에서 만난 니키카이의 '카르멘'은 2003년 공연 이후 약 22년만에 공연하는 새 프로덕션으로 알려졌다. '카르멘'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중 하나인데, 이처럼 오랜만에 무대에 올린 것은 그동안 니키카이가 시도해 온 레퍼토리의 확장과 다양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카르멘'은 소위 팜므파탈이라고 불리는 여성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작품인데, 이번 오페라에서 연출과 지휘 또한 여성이 맡아 화제가 됐다. 연출을 맡은 이리나 브룩은 2022년 타계한 전설적 연출가 피터 브룩의 딸로, 연출가와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이리나 브룩은 작품의 배경을 다양한 요소를 혼합한 가상적 공간으로 설정했다. 영화 '매드맥스'의 아포칼립스 같은 풍경에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면서, 어떤 확고한 시점이나 배경보다는 자유로운 카르멘의 모습이 전달되기 쉬운 상황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그런 이유인지 돈 호세가 속한 주둔군의 막사나 집시의 거주지는 모두 황폐하고 무질서했으며, 군복을 입지 않아 의상으로도 양측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백인 남성의 모범적이고 질서 있는 세계가 집시여인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면서 점차 부랑자처럼 변해간다는 원작과는 다른 해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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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yo Nikikai Opera Theatre "Carmen" photo by Masahiko Terashi
이러한 무대 디자인과 해석은 돈 호세가 카르멘에 대해 느끼는 애증의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집시 무리와 별 다를 바 없는 돈 호세가 카르멘에게 보이는 감정적 행동들에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았다. 더구나 돈 호세가 원작보다 훨씬 더 볼품없고 못난 사내로 그려지기 때문에 그에게 반해 유혹하는 카르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멋진 투우사라기 보다는 우스꽝스러운 차력사처럼 보이는 에스카미요의 모습 또한 개연성이 미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날 가장 박수를 보내고 싶은 부분은 지휘자 노도카 오기사와가 이끄는 요미우리일본관현악단이다. 2019년 브장송 국제 지휘콩쿠르 우승에 빛나는 노도카 오기사와는 일본 여성으로는 최초로 베를린필을 지휘했고, 세이지 오자와의 후계자로 평가되는 등 국제무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일본 지휘자 중 한 명이다. 이날 오기사와는 요미우리일본관현악단의 탄탄한 현악 베이스를 바탕으로 서정성과 탄력을 동반한 연주를 들려줬다. 관악 파트도 초반에는 큰 볼륨으로 균형이 어긋나는 듯 했으나 뒤로 갈수록 조화롭고 섬세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도쿄 니키카이오페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출연진의 대부분을 일본인 성악가로 채우는 것에 있다. 이것은 니키카이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지향점으로, 일본에서 제작한 오페라는 일본인 성악가와 일본인 스태프가 우선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니키카이의 무대를 보면 현재 일본 오페라와 성악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번 공연에도 니키카이를 대표하는 일본의 정상급 성악가들이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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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yo Nikikai Opera Theatre "Carmen" photo by Masahiko Terashi
타이틀롤인 카르멘 역할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노조미 카로는 농후함이 두드러지는 음색과 유연한 음악성, 좋은 연기력까지 겸비해 이날 많은 박수를 받았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질감의 소프라노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아시아 오페라에서 노조미 카로와 같이 자연스럽고 안정된 중저음과 고음을 가진 메조소프라노는 귀한 존재다. 향후 로시니 오페라 등 다른 배역으로 노래하는 모습도 기대된다. 반면, 돈 호세 역할의 테너 히로노리 조와 에스카미요 역할의 바리톤 슌스케 이마이는 작은 음색과 명확치 않은 발음, 고음에서 보여줘야 할 선명한 빛깔 등의 부족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이다. 히로노리 조는 니키카이의 간판급 테너로서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좋은 역량을 보여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드라마틱 테너의 영역인 돈 호세가 그에게 버거웠다는 생각이다.
이날 이리나 브룩의 해석은 여러모로 기존 '카르멘'과는 다른 지점에 있었다. 여성의 자유를 강조한 연출가의 페미니즘 시각이 과도하게 녹아 있기도 했지만 일관된 의도와 감성으로 뚝심 있는 무대를 완성했다. 아버지 피터 브룩은 1981년 '카르멘'을 자신만의 버전으로 재해석한 오페라 '카르멘의 비극'을 선보인 바 있다. 이번 '카르멘'을 보면서 아버지가 '카르멘의 비극'에서 시도한 파격과 기존 오페라의 관습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려 노력한 연출가의 고민을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