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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리포트] 한국 근대화의 설계자, 백영훈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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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원 기자

승인 : 2010. 05. 03. 16:15

'한강의 기적'엔 '눈물과 恨' 있었다
윤성원 기자]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는가.”
6.25전쟁이 끝난 지 2년이 흐른 시점.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쓰레기통’과도 같았다. 1955년 10월 한국을 돕기 위해 파견된 특별조사단인 ‘유엔한국재건위원회(UNKRA)’의 인도 대표 메논(Menon)은 한국을 이렇게 표현했다. 당시 우리나라를 시찰하고 돌아간 영국 ‘런던 타임스’의 사이몬즈 기자도 같은 표현을 신문 헤드라인으로 썼다.

그러나 한국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웠다. 메논의 표현 자체가 식상해져 버릴 정도로 수많은 장미꽃들을 피워냈다. 한국이 피워낸 장미꽃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렸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과 산업 고도화는 이미 세계적 고전이 됐다.

백영훈(79)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그는 ‘한강의 기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우리나라 ‘경제학 박사 1호’로 기적을 일궈낸 원동력과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 머나먼 독일에서 ‘씨앗’을 가져와 이 땅에 심었다.

29일 찾아간 그의 사무실에는 1964년의 박정희 대통령과 서독 에르하르트 수상,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함께 담긴 커다란 액자가 군데군데 걸려 있었다. 사진은 ‘한강의 기적’을 위한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진 순간을 생생하게 담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라인강의 기적’을 목격한 순간이기도 했다.


[인터뷰 = 하만주 정치부장]

◇3번 군대간 사나이

백영훈 원장은 군입대만 3번했다. 1950년 고려대 입학 후 3달 만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북한 의용군부대로 강제 편입됐다. 인민군으로부터 사격교육 등을 받고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던 도중 탈출했다. 9.28 서울 수복 후에는 국군 학도병1기로 징집됐다.

-총은 잘 쏘겠네요.

△인민군에게 배웠죠. M1소총 잘 쐈습니다.(웃음) 미군 3사단에서 통역장교를 뽑길래 학도병 신분으로 지원해 통역장교로 근무했습니다. 1년2개월이 지나 방위군이 해산됐습니다. 서울에 돌아와서 후암동에 있는 병무청에 신고했죠. 그랬더니 군번이 없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1년6개월간 헛고생한 셈이죠.

-독일에는 어떤 계기로 가게 됐나요.

△한국전쟁 후 이승만 정부가 서울에 와서 처음 한 것이 ‘국비장학생’ 시험이었어요. 그 때 경쟁률이 21대 1이었는데,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한 터라 서독을 택했죠. ‘라인강의 기적’에 관한 내용이 신문에 크게 났었습니다. 그 때 서대문 적십자병원, 서울대 부속병원 등 서울 시내 병원 앞에는 자기 피를 팔아 돈을 마련하려는 가난한 이들로 연일 문전성시였습니다. 매혈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메었는지… ‘라인강의 기적’을 찾아 국비장학생 1호로 독일로 간 겁니다.

한독사전도 없던 시기였는데, 일본어를 할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독일의 철학, 경제사 등이 일본어로는 다 출판돼 있었거든요. 하루 1~2시간 자면서 도서관 기숙사에서 공부했습니다. 일본 서적들을 번역해 발표하니 독일 사람들이 놀라더군요. ‘한국에서 수재가 왔다’는 식으로요.

-좀 더 얘기해 주시죠.

△한 가지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 중 1920년에 최초로 독일에 간 이미륵씨 아시죠? 우연히 한국에 온 독일 신부로부터 건네 받은 명함 하나에 의지해 뮌헨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고, 또 현지 여인을 만나 독일어를 배워 동물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사람입니다. 그 분이 뮌헨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쓴 책이 ‘압록강은 흐른다’에요.

이 책이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백의민족의 특성인 순수성에 관해 쓴 이미륵씨의 책을 본 독일 사람들 중 한민족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 독일 생활은 그 분 덕을 많이 본 셈입니다.

최고점수(Summa Cum Laude)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 돌아와 중앙대에서 신바람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습니다. 혁명정부에서 처음한게 ‘병역기피자 소탕작전’이었어요. 하루는 강의하고 있는데 교무처에서 전갈이 와 내려갔더니 경찰 3명이 와 있더군요. 집에도 못 가고 ‘병역기피자 제1호’라는 딱지를 붙인 채 논산훈련소로 들어갔습니다.
 

◇아우토반의 눈물

백 원장에게 갑작스레 붙여진 ‘병역기피 제1호자’라는 멍에는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혁명정부는 이미 ‘한국 최초의 경제학박사’였던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증산 수출 건설’을 이루기 위해서는 백 원장과 같은 엘리트가 절실히 필요한 터였다. 그는 논산으로 끌려간지 3개월 만에 다시 남산 중앙정보부로 불려갔다.

-훈련병 신분으로 중앙정보부에 가게 된 거네요.

△‘중앙정보부 정책판단관’이 직책이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작성과 관련된 자료를 주더군요.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욕을 보였지만 당시 한국은행의 외화보유고는 2000만달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케네디 행정부는 쿠데타로 집권한 혁명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박정희 정권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국교가 없던 일본에게 돈을 빌릴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중앙정보부에서 마지막 카드로 생각해 낸 것이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킨 서독에 가서 호소해보자는 것이었죠.

그러나 서독의 반응도 냉랭했다. 서독은 당시 미국의 ‘마셜계획’에 따라 원조를 받고 있는 처지였다. 서독의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은 한국 대사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당시 정래혁 상공부장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돼 서독을 방문한 백 원장은 에르하르트 장관이 자신의 은사인 포크트 교수의 친구인 것을 알고 은사 댁을 찾아갔다. 일주일 간 새벽마다 포크트 교수 집에 가서 “매일 울며 장관님 만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어떻게 되었나요.

△안 될 줄 알고 있었는데 차관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웨스트릭 경제부 차관은 “3000만달러 상업차관을 주겠으니 외국계 은행의 지급보증을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 공신력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지급보증을 해 주는 은행이 없더군요.

그 때 독일에서 함께 공부하던 슈미트라는 친구가 노동성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이 친구가 신웅균 대사에게 서독에 한국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보내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신 대사는 “문제 없다”고 답했지요. 1962년의 일입니다.

-‘한국의 프로이센’들이 탄생한 배경이네요.

△독일에 파견된 한국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매일 시체를 닦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간호사들의 모습은 독일인들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당시 서독 언론들은 “한국서 천사들이 왔다. 프로이센들이 왔다”며 광원들과 간호사들의 일하는 모습을 대서특필했습니다.

결국 광부·간호사들의 눈물과 땀이 서독 국회의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박정희 대통령을 초대할 것을 요구하는 대정부 건의안을 채택하게 되었고요.

-‘아우토반의 눈물’이 거기서 비롯됐죠.

△서독을 방문하던 박 대통령 일행은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주의 루르 지방 탄광지대로 갔습니다. 탄광 막장 현장에서 갓 나온 500여명의 광부들이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눈만 멀뚱멀뚱하고 얼굴이 새까맣더군요. 대통령의 말문이 막혔습니다. 애국가가 흐르는데 목이 메여 음악소리만 들렸습니다. 준비한 연설문은 읽지도 못했어요. “여러분, 우리 열심히 해서 잘 사는 나라 만듭시다”는 대통령의 외침에 광원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1시간 동안 외쳤습니다.

광원들의 함성을 뒤에 남기고 차에 오른 박 대통령은 뒤돌아보며 아우토반에 올라와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냥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아이고 아이고”하면서요. 옆 자리에 있던 뤼브케 서독 대통령 의전실장이 손수건을 가지고 박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줬어요. 앞에 앉은 저도 눈물이 나와 통역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글로벌 코리아’의 비전
백 원장만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물을 많이 본 사람도 드물 것 같았다. 기억을 회상하며 이따금 눈물을 보이는 그의 모습은 어느새 45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잉태할 수 있었던 것은 고속도로와 사막, 열대밀림 등 서러운 남의 땅에 뿌려진 수많은 이들의 땀방울과 더불어 이들이 조국을 위해 흘린 눈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 회장은 ‘과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가혹하고 치열한 국제경쟁질서 속에서 우리 경제가 살아남기 위한 명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의 위치를 새롭게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순간순간 빛난 아이디어들이 국가 발전에 기여한 것 같습니다.

△물론 서둘다 보니 후회되는 부분도 많습니다.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크게 5가지로 구분할 수 있어요. 세대간 가치관의 충돌, 공직자들의 도덕적 해이, 갈등비용의 증가, 중산층의 몰락, 나라의 어려움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위기에도 한류열풍과 같은 밝고 희망찬 미래 이슈가 있어 다행스럽습니다.

한국 경제의 발전사적 특징은 관민 합동에 의한 개발 전략이라는 독창성에 있습니다. 성장 면에서의 양극화와 불균형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어요. 압축발전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관민 합동의 집중적 경제 개발 전략이 최상이었느냐 아니냐에 대한 답변은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라 봅니다.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 주시죠.

△얼마 전 독일 쾰러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방한했을 때 만났습니다. 쾰러 대통령이 “독일은 통일 이후에도 엄청난 부담을 안고 있다”며 “한국에서 통일 준비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더군요. 독일은 분단 이후 30년에 걸쳐 통일기금을 적립했음에도 경제 안정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이와 관련해 통일기금 마련 캠페인을 통해 평화통일의 미래를 그려보려 합니다. 정치인이 배제된 순수한 민간의 힘으로 시작하려 해요. 통일기금을 모아서 판문점 일대에 세계적 평화도시를 만들고 그 일대를 세계적 중심도시로 만들고자 합니다.


윤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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