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 헌법의 기본원리인 ‘문화국가원리’에 반한다. 문화국가란 문화에 대한 국가적 보호·지원·조정 등이 이루어져야 하는 국가를 말한다. 헌법은 문화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문화는 개별성·고유성·다양성·자율성을 그 본질로 한다. 게임은 표현의 자유의 보호대상이자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다. 게임과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의 보호대상이자 문화콘텐츠인 영화·비디오물·음악·웹툰 등에 대해서 그 이용장애를 질병으로 규정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게임을 정신장애의 원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화국가원리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다.
둘째, 문화콘텐츠산업과 관련된 우리나라 법의 기본적인 입장은 ‘진흥’에 있다. 문화콘텐츠산업과 관련된 법률의 명칭만 봐도 알 수 있다. 예컨대 게임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이외에, 문화산업진흥 기본법,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음악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만화진흥에 관한 법률 등, 문화콘텐츠산업에 대한 우리나라의 정부정책 및 법은 ‘진흥’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으로 분류하는 것은 현행 법체계에 반한다. 한쪽에서는 진흥한다고 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치료와 예방의 대상이 되는 질병의 원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법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알콜중독·도박중독과 관련된 주류산업이나 도박산업은 우리나라에서 진흥의 대상이 아니다.
셋째, 인권으로서의 ‘문화향유권’(right to culture)을 침해한다. 문화향유권이란 유엔 세계인권선언 제27조와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5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권리로서,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 혹은 ‘문화적 산물을 향유할 권리’를 의미한다. 게임은 문화콘텐츠다. 따라서 게임을 정신장애의 원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우리 국민이 향유해야 할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 혹은 ‘문화적 산물을 향유할 권리’를 침해하거나 형해화시킬 위험성이 매우 크다.
넷째, 특정한 행위나 성향을 질병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번에 WHO가 ICD 제11차 개정판을 의결하면서 기존에 정신장애로 분류되어 있던 트랜스젠더를 질병분류에서 제외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는가? 우선 WHO는 특정한 행위나 성향을 질병으로 분류할 때, 당해 행위나 성향이 갖는 사회문화적 맥락이나 개인의 정체성·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트랜스젠더는 성(性) 정체성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서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다. 이번에 WHO가 트랜스젠더를 질병분류에서 제외하면서, 트랜스젠더를 질병코드에 등재했던 점에 대해 그 잘못을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했는지 확인해 볼 일이다. 다음으로 WHO의 질병분류가 절대적인 무오류의 진리나 선(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개별국가 차원에서 WHO의 질병분류를 그대로 수용할 의무나 필요도 없고 그대로 수용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임은 질병의 원인이 아니다. “게임은 문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