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동주' 이준익 감독 "근대사를 정리하지 못한 나라는…'불안'하다" / 사진=이상희 기자 |
시간이 모자랐다. 초면이 아니었다면 술 한 잔 사달라고 조르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판이었다. 짙은 아쉬움에 돌아서는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랬는지 '우리'는 또 한참을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공간을 공유했다. 배웅이 길수록 추억은 선명했다. 사람 좋은 얼굴과 호방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던 이준익 감독과의 잊지 못할 한 시간. 그는 '참 좋은 어른'이었다.
지난해 영화 '사도'에 이어 올해 '동주'로 다시 한 번 역사를 스크린에 담아낸 이준익 감독을 최근 서울 종로구 팔판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동주'는 제목 그대로 일제 강점기 시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윤동주 시인(강하늘)과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로 등장하는 독립운동가 송몽규 열사(박정민)의 아픈 청춘을 그린 영화다.
[인터뷰] '동주' 이준익 감독 "근대사를 정리하지 못한 나라는…'불안'하다" / 사진=이상희 기자 |
이날 이준익 감독과 가진 인터뷰의 내용은 순도 100% 영화 이야기로 채워졌다. 중간중간 새어 나온 감독 개인의 소소한 일화와 인생 철학 역시 '동주'의 흑백화면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첫 번째 화두는 '동주'를 통해 바라 본 현 시대 청춘들의 모습 그리고 감독의 과거 성찰이었다.
"극 중 몽규는 동주가 시인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배려하고, 동주는 그런 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 국가의 독립을 위해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 해요. 현 시대 청춘들이 이런 동주와 몽규의 모습을 보고 공감했다면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죠. 처음 '동주'를 기획할 때에는 그런 메시지를 주겠다는 목적을 세우지 않았지만 나 역시 영화를 연출하면서 화면 속 동주와 몽규, 화면 밖 강하늘과 박정민의 모습을 통해 젊은 시절을 떠올렸어요. '나는 그 나이에 이들처럼 치열하게 살았던가, 자신 앞에 솔직했던가'하고 말이죠."
이준익 감독은 '동주'를 통해 어떤 특정 메시지를 현 시대 청춘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다만 '비동시성의 동시성'(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란 개념을 끌어들여 앞선 설명을 부연했다. 예를 들면 앨범 속에서 교복을 입은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고 '아버지도 지금의 나처럼 이런 순간을 살지 않았을까'하고 떠올리는 것처럼 '동주' 같은 시대극을 통해서 다른 시대를 산 세대가 정서적 교감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청춘 그리고 청춘 시절에 느꼈을 부끄러움에 대한 서로의 난담이 그쳐갈 때쯤 우리는 다시 '동주'와 마주했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가 '수치스러운 순간들에 솔직하자'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시대가 주는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진실의 고백"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을 힘주어 말했다.
"윤동주 시인이 서거한 지 71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그의 삶이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죠.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고 좋아하면서 '우리는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알고 있지 않다면 그의 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한번 그 시대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 등 그가 지켜내고자 했던 가치에 대해서 살펴봐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준익 감독은 '동주'를 만들게 된 계기를 위에 나열한 질문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근대사를 정리하지 못한 나라의 현재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고. 그는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동주'를 만들면서 단 한 가지 생각을 가슴에 품었다고 했다.
"'동주'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가슴에 윤동주 시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절대 그를 훼손하지 말자는 것이었죠. 이를 위해 단출함이 주는 강렬함을 꾀했어요. 흑백화면도 단출함을 추구한 연출의 일환이고, 인물 심리를 파고드는 기타의 선율 역시 단출하지만 관객들에게는 강렬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인터뷰] '동주' 이준익 감독 "근대사를 정리하지 못한 나라는…'불안'하다" / 사진=이상희 기자 |
우리의 마지막 화두는 '열등감'이었다. 공교롭게도 이준익 감독의 영화 속 몇몇 인물은 열등감의 정서를 지닌 채 성장하거나 때론 무너졌다. '라디오스타'의 최곤(박중훈)은 '가수왕'으로 군림했던 과거를 '명함'삼아 현재를 빌어먹는 인물로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의 도움 끝에 열등감을 극복했다. '사도'의 사도세자(유아인)는 아버지 영조(송강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며 스스로를 극으로 몰았던 인물로 끝내 무너졌다. '동주'에서는 동주가 몽규로부터 느끼는 열등감이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이준익 감독은 어떠한 의도로 '열등감'을 영화 속 인물의 주된 정서로 사용했던 것일까. 그가 생각하는 '열등감'은 무엇일까.
"모든 인간이 열등감에 휩싸여 산다고 생각해요. 즉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열등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사도세자는 자신의 열등감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해 파국을 맞이한 인물이고 최곤 역시 처음에는 열등감을 지혜롭게 극복하지 못해 사고를 쳤지만, 매니저 박민수를 만나 이를 뛰어넘어요. 동주는 몽규에게서 사회적 열등감을 느끼고, 몽규는 동주에게서 태생적 열등감을 갖죠. 몽규 아버지가 아들을 앞세워 자랑하고 과시하는 것은 모두 열등감에서 나온 행동이라서 몽규는 치열하게 동주보다 앞서 나갔던 것이에요."
[인터뷰] '동주' 이준익 감독 "근대사를 정리하지 못한 나라는…'불안'하다" / 사진=이상희 기자 |
인터뷰 도중 이준익 감독에게 동주와 몽규 중 누구와 더 닮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에게서 "몽규처럼 함부로 말하고 동주처럼 부끄러워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를 뒷받침하듯 그는 어떤 성공에 의해 스스로가 과포장되는 것이 불편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작은 성공에 으스댄 것이 부끄럽다며 말이다. 그의 얘기를 듣고 어쩌면 '동주'가 중년이 된 이준익 감독의 뒤늦은 반성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에 대한 궁금증은 다음을 기약하며 술 한 잔에 담아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