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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통하라” 외환위기때 미국, 일본의 긴급지원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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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원 기자

승인 : 2012. 08. 28. 16:54

* 윤광원의 머니임팩트(제75회) - IMF 막전막후의 이야기(2)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구제금융 협상 주역이었던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좌)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도시락으로 점심을 같이 하면서, 외환위기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아시아투데이 윤광원 기자 = 루빈과 호흡을 맞춰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주도했던 로렌스 서머스 당시 미 재무부 부장관의 생각은 어떨까.

다음은 서머스가 지난 2007년 5월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내용 중 일부다.

"(위기의 원인은) 한국정부의 치명적 실수 때문이었다. 가장 큰 실수는 거시경제정책 운용의 실패였다.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매우 투명하지 못한 경제시스템 역시 문제였다. 극도로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허점을 감추기 위해 무수한 '서류상 도구(paper work)'들이 동원됐고, 결국 현실에서 그 폐해가 한꺼번에 터져 버린 것이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금융분야의 구조적인 결함, 거시경제정책 운용 실패로 인한 외환보유고 조절 실패, 녹록하지 않았던 국제경영환경이 모두 한데 뒤엉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솔직히 우리는 태국의 위기가 한국으로까지 번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한국정부는 한국이 처한 어려운 상황과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났다는 사실 자체를 밝히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을 끝까지 숨기고 있었다. 결국 추수감사절 시즌, 한국은 국가부도사태를 불과 며칠 남겨 둔 상황에서, 외환보유고가 바닥났다는 사실을 터뜨렸다.

이게 바로 한국경제가 '매우 심각한 투명성부족(lack of transparency)'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말한 이유다"

서머스는 당시 한국의 외환위기에 대한 미국정부 내 시각을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한국의 금융위기를 크게 두 가지 국면으로 나눠서 분석했다. 11월 말에서 12월초가 첫 번째 시기다. 이 당시 한국정부는 경제정책의 조정보다는 전적으로 IMF의 자금지원에 일방적으로 기댔다. 그러자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원화가치는 더 내려가고, 외국자금들이 급속히 빠져나갔다.

그리고 12월에 IMF의 정책권고 내용보다 한국이 자본시장 개방을 더 확대할 경우, 구제금융을 조기에 제공하는 협상을 했다. 이때부터 한국은 서서히 신용을 회복해 나갔다.

투자자들과 채권자들은 한국의 대통령선거 후 자본시장개방 등 일련의 약속이 지켜질 것인지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김대중 당선자가 이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피력하면서, 상황은 급 반전됐던 것이다"

한때 국내 및 세계 학계에서는 '외환위기 음모론'이 널리 퍼졌다. 미국정부와 IMF 및 월가의 금융자본이 한국의 외환위기를 부추겨, 미국기업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다는 것.

그 일환으로 당시 일본이 한국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미국이 압력을 넣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서머스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당시 미국정부와 일본정부의 지배적인 의견은 한 국가에 어마어마한 자금을 지원한다고 해도, 해당 국가의 거시경제정책의 기본적인 틀이 변하지 않으면 그 국가경제가 살아나는 게 불가능할 뿐 아니라, 막대한 지원자금 역시 물거품이 돼 버린다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자금을 지원한다고 해도, 한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면 경제적인 개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요소들에 휘둘릴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에 필요했던 것은 단순한 지원이 아니었다. 바닥부터 곪아 있던 경제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무언가가 절실했다. 미국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강력한 정책변화 없이 단순 자금지원을 통해서는, 결코 한국경제가 장기적으로 정상화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한국의 진정한 경제개혁을 위해 일본의 긴급지원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측 협상책임자였던 임창렬 전 부총리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한국의 경제시스템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바꾸려는 미국의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미국은 이전부터 한국에 무역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를 계기로, 이런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양자협상에서는 이를 관철시키기 어려우니까, IMF를 내세운 것이다. 실제로 IMF와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 재무차관이 같은 호텔에 머물며 끊임없이 협상에 관여했다.

이것은 일본정부도 마찬가지다. 일본 역시 외환위기 협상과정에서 일본제품의 수입을 제한하던 우리의 수입다변화 정책을 해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2007년 11월 〈이코노믹리뷰〉)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현 새누리당 국민행복특별위원장)도 "그 무렵 일본은 우리에게 달러를 빌려주려는 자세를 가졌지만, 미국에서 "IMF를 통해 수습을 해야지, 개별국가 지원은 절대 안 된다"는 카드를 들이미니까 꼼짝 못 한 것이다.

결국 한국의 외환위기는 미국 입장에서 보면, 동북아에서의 주도권과 영향력을 누가 행사하느냐 하는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조갑제, 《노태우 육성회고록》)

한편 '만약 한국경제가 부도났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질문에 서머스는 "당시 11위 경제대국이던 한국이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을 선언해 한국의 금융기관들이 차입금을 갚지 못하고, 통화를 태환할 수 없는 형태로 전환하게 되면, 세계경제에 어마어마한 풍파가 불어닥칠 거라고 예상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이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고 밝혔다.

당시 IMF가 고금리를 강요해 필요 이상으로 국내경기를 위축시키고,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이같이 반론을 편다.

"당시 한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원화가치가 거의 '자유낙하'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단 원화가치를 잡는 게 가장 시급했다. 진화를 위해선, 화폐를 많이 찍어내는 것보다 덜 찍어내는 게 유리하다. 이는 당연히 고금리정책을 수반한다. 나는 강력한 고금리정책을 통해 일단 신용을 회복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고, 지금도 이 생각엔 변화가 없다.
 
만약 그 당시 강제적인 고금리정책이 없었다면, 과연 한국경제가 안정될 수 있었을까? 대답은 확실한 노(No)이다.

고금리정책은 당시 상황의 역학을 바꾸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가장 큰 문제는 투자자들로 하여금 한국이 자본을 투입할 만한 매력적인 나라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자본의 대가인 이자율이다. 따라서 광범위한 IMF 정책권고사항은 옳은 선택이었고,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학자들의 상당수가 당시 미 재무부와 IMF의 처방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미국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을 지낸 하버드대 마틴 펠드스타인 교수는 "한국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국제금융환경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서, 단기 외자차입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점"이라며 "IMF가 처방한 고금리와 재정긴축은 불필요했다"고 지적한다.

또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IMF가 위기에 처한 국가의 취약점을 강조함으로써, 안 그래도 불안해하는 국제투자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입장이다.
 
삭스 교수는 "잘못된 IMF의 접근방법 때문에 한국, 태국 등 외환위기를 당한 국가들의 어려움이 더 가중됐다. IMF와 미국이 더 조용한 방법으로 단기외채의 중장기 전환을 도와주었다면, 좀 더 작은 대가를 치르면서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IMF는 부정부패, 관치금융 등을 지적했지만, 아시아국가들에게 돈을 빌려준 국제투자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위험(tolerable risk)'으로 간주했었다"고 비판한다.

〈뉴욕타임스〉는 "루빈 재무장관이 취임 후 한국, 태국 등 신흥공업국의 자본시장 개방을 역설, 그 결과 이들 국가들의 자본시장개방을 헤지펀드 등 국제투자가들이 최대한 활용했다"고 꼬집었고,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IMF의 지나친 긴축정책이 한국기업의 도산을 초래해, 결과적으로 국제신인도를 더 떨어뜨렸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캐나다 오타와대 미셸 초수도프스키 교수는 지난 2005년 "IMF와 맺은 모든 협약을 무력화시키고, 외국자본이 도둑질해간 국부를 환수하라"며 "구제금융이 한국에 긍정적 영향을 준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극단적으로 비난했다.

이에 대해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는 "IMF가 한국에 요구한 정책처방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반박한다.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심각해서, 충격이 적은 방안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했고, IMF프로그램이 국가별도 대동소이했던 것은 각 국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각국의 상황이 유사했기 때문이며, 극단적인 고금리정책 역시 환율의 급격한 평가절하를 막고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논리다.

노태우 전 대통령 측 인사들은 문민정권이 6공 정권의 재벌규제정책을 폐기하고, 재벌들의 고삐를 풀어준 것이 IMF의 원인이라고 본다.

노 전 대통령은 《노태우 육성회고록》에서 이런 주장을 펴고있다.

"IMF체제가 된 후, 캉드쉬 총재가 기자회견에서 "7년 전에 한국이 시도하다 못한 것을, 우리가 도와주는 것이다"라는 아쉬움을 토로한 내용을 들은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991년 초 우리나라 5대 재벌의 부채는 5조원 정도였는데, 1997년 IMF사태가 터질 때 보니까 불과 5년여 사이에 24~25조원으로 다섯 배나 늘어나 있었다.

지금 IMF의 신탁통치를 받아 진행되고 있는 일 중의 상당부분이 이미 내 재임 중에 시도됐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예컨대 지금에 와서 투명경영의 기본조건으로 요구되고 있는 연결재무제표만 해도, 그 당시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재벌들의 반대로 별 성과를 보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이와 관련해 상호지급보증 문제만큼은 첫 시동을 걸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태우는 최근 직접 쓴 회고록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김영삼 정부가 외환위기로 국가를 부도위기에까지 몰리게 한 것을 두고, 그 원인을 6공화국에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부당성은 수치를 비교해보면 간단하게 밝혀진다.

6공 말의 총외채는 430억 달러, 순외채는 100억 달러 내외였다. 그것이 김영삼 정부에 들어가 4배 가까이 늘었다.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의 총외채는 1600억 달러 가까이 되었는데, 나중에 기업들 것까지 합쳐보니 2000억 달러에 이르렀다. (중략)

김영삼 정부 들어 경제가 엉망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금융산업을 방만하게 관리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부채가 5년동안 4~5배나 늘어난 데서 알 수 있듯이, 무턱대고 돈을 풀어 기업들이 멋대로 자금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결정적인 잘못이었다.

1991년에 정부는 재벌기업들에 대해서도 핵심업종 3개 이외에는 대출 자체를 중단시켰는데, 김영삼 정부는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를 규제로만 생각해 풀어버림으로써, 방만을 자초했던 것이다"

또 김종인 전 수석은 "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이 IMF로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권 초기에 재계의 요구를 비판 없이 수용한 데 있다고 본다. 재벌들이 '6공이 업종전문화니 뭐니 하며 재벌을 틀어쥐는 바람에, 경제발전이 위축됐다. 이것을 풀지 않으면 경제성장이 어렵다'고 하소연하니까, 정부가 이것을 받아들인 거다.

그래서 나온 정책이 '신경제 100일 계획'인데, 이 때부터 각 분야에 걸쳐 재벌들의 중복 과잉투자가 시작된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그토록 힘겹게 재벌들의 신규투자를 억제하고 주력업종제도를 통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펼쳤지만, 김영삼 정권에 들어와 '신한국'이니 '신경제정책'이니 하면서, 그 동안 옭죄었던 재벌들의 투자욕구를 풀어놓았다. 그 결과 각 사업분야에서 중복 과잉투자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중략)

빚을 얻어서 투자를 하더라도, 투자기간 동안에는 성장률이 높아지게 돼있다. 밑지면서 수출을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대신 적자가 나는 부분은 전부 은행이 떠 안아야 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 이런 현상으로 야기된 거품수치를 가지고 '우리 경제의 기초는 매우 튼튼하다'고 선전했던 것이다. 정부의 선전이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하면 '개혁저항세력'이니 뭐니 하고 몰아붙이니까, 사람들이 입을 다무는 바람에 경제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위 
《노태우 육성회고록》)

즉 6공 측 인사들은 김영삼 정권의 정책실패를 꼬집으면서, 역으로 자신들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은근히 자랑하는데, 그들은 금융실명제가 IMF의 한 원인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 시대 개발경제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막론하고, 경제가 잘 되느냐 못 되느냐는 정부의 역할에 달려있으며, 국가원수의 능력과 리더십의 책임이 제일 크다.

'한국형 경제건설모델'에는 두 가지 과정이 있는데, 경제건설 단계와 경제운영관리 단계이다. 우리는 경제건설 단계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운영관리 단계에서는 실패해서 IMF를 맞게 됐다.

1960년대 초 경제개발에 착수한 후, 우리나라는 세 번의 경제위기를 맞았다.

첫 번째가 1963~1964년의 외화고갈에 따른 위기이고, 두 번째가 1973년도의 제1차 석유위기(석유파동) 때였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가 된다. 경제위기의 형태는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제1차 위기 때나 제2차 및 이번의 IMF사태 등이 모두가 외화고갈로부터 연유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천연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식료품을 비롯해서 에너지, 천연원료, 기본소재, 중간부품과 완제품, 심지어 기술까지 수입해야 하기 때문에 외화가 필요하다. 이 달러가 고갈되면 국가의 경제운영을 지탱할 수 없게 되고, 바로 경제위기로 발전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들어서 아시아에는 '네 마리의 용'이 있었다. 경제성장의 모범국들이다. 그런데 이들 네 마리 용 중 IMF위기를 맞은 것은 불행히도 대한민국뿐이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이)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이나 1960~1970년대의 한국과는 다른 길을 갔다는 뜻이다.

네 마리의 용은 모두 수출을 해야 국가경영을 해 나갈 수 있는 나라들이다. 수출이 '국시(國是)'가 돼야 한다.

그리고 국가경영을 건실히 하기 위해서는 달러를 절약해서 국제수지 흑자를 내야만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나라살림에 차질이 생기면 바로 IMF사태가 닥쳐오는 것인데, 이러한 극히 상식적인 진리마저 무시한 결과, 위기를 맞게 됐다"

이러한 기본 인식 하에 오원철은 수출을 많이 해서 달러를 벌어들이고 외화를 절약함으로써 IMF에서 빌려온 외채를 갚아버리면 된다는, 어찌 보면 간단한 해법을 제시한다. 박정희 시절의 수출제일주의 부활을 강조한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김영삼 정권은 경제에 관한 한 완전히 낙제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 직후 '신경제 5개년 계획'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발표했다. 1996년 OECD에 가입하고, 1998년에 1인당 국내총생산(GNP) 1만4000 달러 달성으로 선진경제권에 진입하며, 물가는 3%대로 억제, 7%의 경제성장, 수출증가율 9% 달성, 경상수지는 1994년부터 흑자로 반전되면서 계획기간 말에는 104억 달러에 이른다는 전망이었다.

이 약속대로 실제 실천된 것은 OECD가입 하나뿐이다.

YS가 퇴임한 1998년의 1인당 GNP는 겨우 7355 달러로, 취임 전해인 1992년의 7527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GNP 1만4000 달러의 꿈은 다시 6년 후인 2004년에야 달성됐다.

YS는 1998년 2월 20일 청와대 출입기자단과의 고별간담회에서 "지난 5년 간 영광의 시간은 짧았고, 고뇌의 시간은 아주 길었다. 특히 IMF 금융지원체제로 국민여러분께 큰 고통을 안겨드리게 되어, 어떻게 죄송스러운 말씀을 드려야 할지, 참으로 안타깝다.

사태가 이렇게 된 책임은 오로지 대통령인 저에게 있으므로, 어떠한 책임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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