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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추락,“여자 밝히는 보통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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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남 기자

승인 : 2011. 05. 24. 20:00

추정남 기자] 지난해 중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경제학자로 선정된 마오위스가 중국 네티즌들에게 고소당했다.

미국의 소리방송은 23일 '마오쩌둥을 보통사람으로 돌려놓자'는 글을 통해 마오의 30년 집권 기간동안 죄를 매섭게 비판한 마오위스가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모임 유토피아라는 웹사이트 회원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3년의 대기근으로 인해 3000여 만 명이 아사한데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며 수 없는 여성들을 농락했다고 비판했다. 

지난 6일에는 중국 역사교과서의 집필자이자 중국중앙(CC)TV역사강의로 대중스타가 된 위안텅페이가 마오쩌둥을 '인민들의 손에 피를 묻힌 백정'이라고 소개해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마오쩌둥은 중국에서 아직 건재한가? 아니면 추락을 시작했는가?      

◆“마오쩌둥은 3000만명을 굶어죽인 죄인이다”     

마오위스는 글을 통해 마오가 3년의 대기근 동안 아사한 3000만명에 대한 책임을 져
   
야 한다고 주장했다.그가 언급한 기근은 1958년부터 3년간 이어졌다. 이때는도처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중국사 전문가인 벤자민 양도 당시 굶어죽은 사람이 어림잡아 3000만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마오위스가 이를 마오쩌둥의 책임으로 돌린 것은 1953년부터 시작된 마오쩌둥의 경제정책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모국은 소련에 대한 모방을 포기하고 대약진 운동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선포한다. 

소련은 당시 농업생산물에서 얻은 이익을 중공업에 투입하고 공업과 농업의 선순환적 경제구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많은 인구때문에 잉여 농산물이 없어 중공업에 투자할 자본을 축적할 수 없었다.

마오쩌둥은 국가의 모든 자원을 중공업분야에 투자해 영국과 미국을 따라잡겠다며 마을마다 쇠붙이로 된 것은 죄다 수거해갔다. 숟가락과 냄비를 녹여만든 철로 중공업의 기치를 세우겠다 다짐했지만 혹독한 노동과 말도 안되는 분배에 절망한 농민들은 조직적 태업으로 저항했고 곡식 소출은 거의 전무했다.         

◆그는 수없는 여인을 농락했다...“부인 보다는 하녀”     

마오쩌둥의 여자 문제는 마오위스만 언급한 것은 아니다. 이를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한 사람은 역사학자 양중메이다. 그는 저서를 통해 "부인보다는 첩이 좋고, 첩보다는 몸종이 좋고, 몸종보다는 기생이 좋다"는 중국 속담을 인용해 마오쩌둥의 여성문제를 지적했다.

마오쩌둥의 첫 부인은 16살때 결혼해 얼마안돼 사별한 뤄씨 부인을 제외하면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마오안잉을 낳은 양카이후이다. 그녀는 1927년 8월 마오쩌둥이 호남에서 일으킨 봉기때문에 호남 군벌 하건에게 붙잡혔다. 하건은 그녀에게 "마오쩌둥과 부부의 연을 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면 바로 풀어주겠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제안을 거절했고 총살당했다.

그러나 그 시간 호남 군벌을 피해 징강산으로 들어간 마오쩌둥은 이곳에서 만난 비적 우두머리의 사촌여동생 허쯔전과 결혼했다. 그녀는 마오쩌둥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지만 결국 그가 강청 등 다른 여인을 가까이 하면서 버림받고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모택동이 만난 여인 가운데 가장 큰 권력을 누린 사람은 강청이다. 마오쩌둥은 상하이에
   
서 배우 활동을 하던 그녀의 다위샤쟈라는 연극을 본 후 그녀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여인이었던 장위펑은 마오쩌둥의 전용열차에서 하녀일을 하다 그의 수행비서가 됐다. 전용열차 자체가 별궁이었으니 그 안에서 시중드는 여인들은 모두 마오의 여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만 믿게된 마오쩌둥 때문에 그녀의 말은 곧 최고지시사항이 돼 버렸고 당시 총리였던 허궈펑은 국가대사를 보고하고 싶어도 잠자는 장위펑을 깨우지 못해 마오쩌둥의 처소안에 들어갈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화를 내면 저우언라이 총리까지 달려와 화를 풀어줘야 할 정도였다고 부주석인 왕훙원은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그녀에만 만족할 마오쩌둥이 아니었다. 양중메이에 의하면 당시 상하이 홍치아오에 고급 기생집 기생수는 6000명이었는데 이들은 사람의 말을 들어줬을 뿐 아니라 성적욕구도 만족시켜주는 능력이 있었다며 마오쩌둥이 이곳을 학교삼아 자주 드나들었다고 했다. 또 특히 학력수준이 낮고 솔직한 여성을 좋아했는데 이런 여성들은 학식이 풍부한 마오를 만나면 그를 숭배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추락하는 마오 VS 건재한 마오

마오의 추락은 최근 몇 년 들어 자본주의에 물든 중국에 의해 여실히 보여졌다. 

지난 2006년 중국 저장성 닝보에서는 한 남성이 콘돔을 팔다 재판에 회부됐다. 갑가지 들이닥친 산업관리국 직원들은 콘돔에 중국어로 사용설명하는 문구가 적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나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었다. 

가게 안 창고를 조사하던 공무원들이 장씨가 콘돔에다 마오쩌둥의 얼굴을 그린 것을 발견했다. 또 옆에는 '여자 킬러'라는 문구까지 새겨져 있었다. 당국은 그가 마오쩌둥의 여성편력을 비웃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2008년에는 광동성 한 쇼핑몰에 있던 마오쩌둥의 전용기가 매물로 나왔다. 쇼핑몰 주차공간이 부족하다는 쇼핑목측의 불만으로 매물 결정이 났다고 한다.

최근에는 역사학자나 유명인들에 의해 직접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앞서 언급한 마오위스외에도 지난 6일에는 중국 최고의 역사 선생님으로 알려진 위안텅페이가 문화대혁명 강의에서 공개적으로 마오를 비난했다. 그는 중국중앙(CC)TV에서 역사강의로 대중스타가 된 인물로 중국 역사교과서의 공동집필자이기도하다. 

그는 "톈안먼 광장의 마오쩌둥 기념관을 가면 이곳이 중국의 야스쿠니 신사임을 잊지 말라. 거기에는 인민들의 피를 손에 묻힌 한 백정이 숭배받고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어 "마오쩌둥이 1949년 이후 한 일가운데 유일하게 올바른 것은 숨진 것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마오쩌둥을 따르는 중국 네티즌들의 질타를 피해갈수는 없었다. 네티즌들은 그의 그간 발언들을 모두 모아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마오는 장제스 처럼 일당독재자”, “일본 역사교과서가 중국 것보다 덜 왜곡돼 있다. 중국 것에 진실은 5%에 불과하다”, “1959∼1962년 3년 동안 중국의 대기근으로 숨진 사람은 3000만 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의 사망자 수를 넘는다” 등 그의 과거 발언은 하나 하나 인터넷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일부는 그가 최근 출간한 역사책을 광고하기 위해 엉뚱한 발언으로 주의를 끌고 있다는 비난까지 했다.

홍콩 언론들은 이 사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마오를 존경하고 있다"는 평론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일상에서도 마오의 건재함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위안에서 100위안까지 중국에서
   
 발행되는 제폐6종의 인물은 모두 마오쩌둥이다. 택시안에서는 아직도 마오쩌둥 어록을 달고 다니는 기사가 있으며 그가 새겨진 액세서리라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베이징 판자위안같은 고미술거리에서 그의 문집과 초상화, 사진 등이 고가에 팔린다. 

최근에는 빈부격차에 대한 불만과 사회주의에 대한 향수 등으로 붉은 혁명가 같은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인터넷에는 '마오쩌둥 깃발''홍색 중국'같은 좌파사이트가 주목을 받고 있으며 이들은 마오쩌둥 우상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추정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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