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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인도네시아·파푸아뉴기니·동티모르·싱가포르 등 아시아 태평양 4개국을 순방했다. 11일간 이어졌던 이 순방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재임 기간 중 시간과 거리로도 가장 긴 순방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중 아시아 출신 추기경의 임명도 확대했다. 2005년과 2013년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 참석할 수 있는 아시아 출신 추기경은 10명이었지만 이제는 두 배가 넘는 23명으로 늘어났다. 아메리카와 유럽에 비해 가톨릭이 소수 종교인 아시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조화'란 가치에 주목했고 교회의 미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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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아태 4개국 순방에서 동티모르를 찾았다.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겪고 이후 24년간 또 다시 인도네시아의 점령을 겪었던 동티모르의 독립 투쟁에선 가톨릭 교회가 큰 역할을 해왔다. 2002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동티모르는 국민의 약 96% 이상이 가톨릭신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독립한 동티모르를 찾은 첫번째 교황이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인도네시아의 점령 지역이었던 동티모르를 찾은지로부터는 35년 만에 이뤄진 방문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은 '독립 이후 최대 사건'으로 꼽힌다. 교황이 집전한 미사에는 약 60만명이 참석했는데 이는 인구 130만명의 동티모르 국민 절반에 가깝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동티모르 방문은 독립 이후 교황의 '첫 방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호세 라모스 오르타 동티모르 대통령은 "교황께서 우리를 세계 지도에 올려주셨다"고 평가했다. 교황을 맞이했다는 것은 동티모르가 대규모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국가'로서의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준 셈이다. 이는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정식 회원국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동티모르가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기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오르타 대통령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대국들에 맞서 싸우고 평화를 위해 헌신했으며, 가난한 이들과 빈곤 국가들을 억압하는 세력에 맞서 싸운 매우 용기 있는 교황이었다"고 추모했다. 동티모르는 교황의 선종 이후 일주일의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하고 반기를 게양토록 했다.
◇ 암살 위협에도 종교간 화합 추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은 나라'인 인도네시아를 찾는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교황을 향한 테러 위협이 제기되기도 했다. 지난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필리핀을 찾았을 당시엔 실제로 이슬람 테러단체의 암살 기도가 두 차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전체 인구 2억 8000만명 중 87%가 무슬림인인 인도네시아에서 가톨릭 신자는 약 2.9%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동시에 필리핀과 중국에 이어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가톨릭 신자가 많은 나라다. 이런 인도네시아를 찾은 교황은 동남아 최대 규모의 모스크인 자카르타의 이스티크랄 모스크를 찾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곳에서 인도네시아 내 6개 공식 종교 대표들과 회동했고, 이슬람 최고 성직자인 우마르 대(大) 이맘과 종교간 화합을 위한 이스티크랄 선언문에 서명했다. 선언문은 "종교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용돼선 안되고 갈등을 해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교황도 "우리는 모두 형제이며 차이를 넘어 신에게 향하는 순례자"라는 화합의 메시지를 전했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교황의 단순함과 다원주의, 가난한 이들을 향한 배려, 그리고 이웃을 돌보는 삶의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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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기후 변화 위기 등 환경 문제에도 목소리를 냈다. 프란치스코 교황 이전까지만 해도 기후 변화 위기는 '정치적 의제'란 이유로 교회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문제란 인식이 강했다. 교황은 취임 첫해인 2013년 환경 보호 필요성을 언급하며 세계 지도자들이 노력을 기울여줄 것을 당부하며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환경과 사회적 위기, 두 가지 별개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 아니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하나의 위기에 마주하고 있다"며 기후 변화 위기에 주목하며 꾸준히 목소리를 내 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서 채택된 파리협정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태평양 전역의 가톨릭 교회가 참여하는 태평양교회협의회는 성명을 통해 "교황의 종교간 화합 정신, 사회적·생태적 정의에 대한 헌신과 특히 우리 가운데 가장 연약한 이들, '가장 작은 이들'을 향한 연민에 기반한 리더십은 큰 영감이 됐다. 태평양 공동체에 크게 남을 유산이 될 것"이라 추모했다.
또 프란치스코 교황이 쓴 두 회칙인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와 '하느님을 찬미하여라(Laudato Deum)'이 "생태적 전환의 필요성, 화석연료 시대의 종식, 창조 질서를 사로잡은 기업 권력의 종식에 대해 선언한 핵심 문서"라 평가했다. 교황은 '찬미받으소서'는 기후변화에 대한 긴급한 대응을 촉구했고, 2023년에는 후속 교황권고인 '하느님을 찬미여라'를 통해 기후변화를 부정하거나 행동을 미루는 정치인들에게 마음을 돌릴 것을 호소했다.
이 같은 교황의 행보는 해수면 상승과 싸우고 있던 파푸아 뉴기니 국민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제임스 마라페 파푸아 뉴기니 총리는 지난해 교황의 방문이 "우리나라에 있어 엄청난 정신적인 의미를 안긴 순간"이었다며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지난달 말 파푸아 뉴기니의 선교사이자 순교자인 피터 토 롯의 시성을 승인해 파푸아 뉴기니의 첫 성인이 탄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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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대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에 큰 슬픔에 빠졌다. 필리핀은 인구의 80%가 가톨릭 신자이자 아시아 최대의 가톨릭 국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5년 필리핀을 방문했을 당시 태풍 하이옌의 피해가 심각했던 중부 레이테주의 주도인 타클라반을 찾았다. 2013년 필리핀을 할퀸 태풍 하이옌은 사상 최악의 태풍으로 꼽히는데, 레이테주에선 하이옌으로 7350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당시에도 태풍 메칼라의 영향으로 인한 강풍과 폭우가 심했지만 78세의 교황은 이를 뚫고 타클라반을 찾아 우비를 입고 미사를 집전했다. 수도 마닐라에서 교황이 집전했던 미사에는 700만명에 가까운 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
교황의 선종 소식에 수도 마닐라 전역에선 교황을 추모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깊은 신앙과 겸손함을 지닌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혜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이끌었다"고 애도했다.
교황이 폭풍을 뚫고 찾았던 레이테주가 지역구인 마틴 로무알데스 필리핀 하원 의장도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그 이상의 존재였다"며 "아버지 같았고, 친구 같았으며 어둠 속에서의 등불과도 같았던 분"이라고 추모했다. 또 "하이옌이 휩쓸고 간 후 우리 필리핀 국민들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을 때, 타클로반(레이테주의 주도)을 직접 찾아오셨던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 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