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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애스터’는 일본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무뢰파 작가 이시카와 준이 1956년 발표한 단편소설 ‘시온이야기’(紫苑物語)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시카와 준은 현실생활과는 거리를 둔 반리얼리즘 작품세계를 펼친 작가로, ‘시온이야기’ 역시 음울한 허구의 세계 속에서 인물의 내면을 깊고 절실하게 파고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일본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대대로 칙찬 시집을 편찬해왔을 정도로 시(詩)의 명가에서 태어난 무네요리가 가업으로 내려오는 시인의 길을 거부하고 활을 잡은 궁수가 되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다루고 있다. 무네요리는 가업 잇기를 당연시 하는 아버지와 시인으로서 타고난 재능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활을 들어 살생을 일삼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진정으로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끝없이 고뇌하고 번민한다.
신국립극장은 이처럼 팽팽한 긴장과 관념으로 가득 찬 이야기를 화려한 볼거리와 극적인 음악을 동반한 현대적 오페라로 재탄생시켰다. 이 오페라는 본격적인 대본과 작곡 창작에 소요된 기간만 2년이 넘을 정도로 신국립극장이 심혈을 기울여 기획, 제작했다고 한다. 신임 예술감독인 오노 카즈시의 의지가 반영된 첫 시즌 창작 위촉 작품이라는 이유도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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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나 독일 오페라와는 달리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자국의 언어를 오페라에 알맞도록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이날 오페라는 일본어로 오페라를 노래하는 것에 많은 진전을 보였다. 이 같은 성과는 1950년대부터 오페라에 적합한 일본어 리브레토(오페라 대본)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해 온 결과물로 생각된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현악기를 바탕으로 한없는 심연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주었던 서곡이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의 과거와 행동에 대한 인과관계가 설명된다. 그리고 일순 화려하게 전환되는 무대는 무네요리와 세도가의 딸인 우츠로 공주의 결혼식 장면이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대립되는 두 명의 여성과 두 명의 남성이 등장한다. 무네요리의 정략결혼 상대인 우츠로 공주와 그가 사랑하는 여인인 치구사, 그리고 가업을 강요하는 아버지와 무네요리에게 활쏘기를 가르쳐준 백부 유미마로는 서로 반대 지점에 서있는 인물들이다.
무네요리를 노래한 바리톤 타카타 토모히로는 묵직한 성량과 진지한 음색으로 갈등과 번민으로 가득 찬 주인공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고뇌하는 악역을 맡은 그는 흉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섬세한 감정표현과 연기를 통해 작품의 무게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었다. 우츠로 공주를 맡은 메조 소프라노 시미즈 카즈미 또한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단연 돋보였다. 이 오페라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정략 결혼식에서 우츠로 공주는 신부답지 않게 육욕과 욕정에 넘치는 노래를 부른다. 이 장면에서 시미즈 카스미는 농후하고 힘이 넘치는 가창과 연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름다운 여인 치구사는 사실 무네요리가 쏜 화살을 맞은 작은 여우의 화신으로, 그녀의 등장은 오페라를 현실과 환상세계를 넘나들게 만든다. 치구사는 콜로라투라의 기교가 돋보이는 카덴차를 노래한다. 비화성음이 두드러진 화려한 카덴차는 그녀의 신비스런 마력을 돋보이게 하는데 효과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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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후반부에 출연해서 무네요리와 상반되는 지점에 서 있는 인물인 헤이타는 사실 그의 이상적인 분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시종일관 불안정하고 팽팽한 긴장 속에 전개되던 음악은 헤이타의 등장과 함께 협화음으로 전환하면서 평화스러운 분위기로 바뀌는데 이는 헤이타의 내적 평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무네요리와는 정반대로 헤이타는 자신에게 주어진 업(業)과 존재의 이유에 대해 한 점의 의구심도 없이 돌산에서 묵묵히 불상을 조각하며 살아간다. 무네요리와 헤이타의 듀엣은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로 꼽을 수 있다. 하나의 존재 안에 다른 두 개의 자아가 마주 하면서 무네요리를 지배하던 현실세계는 무너진다.
니시무라 아키라의 음악은 두터운 오케스트레이션을 바탕으로 다양한 악기군을 활용해 화려하고 마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선명한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장면마다 주도동기를 사용함으로써 작품을 하나의 유기체로 연결했다.
음악적으로 이런 정도의 완성도를 이룰 수 있었던 것에는 오노 카즈시가 지휘한 도쿄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의 활약이 컸다. 오노 카즈시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도쿄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는 강한 집중력으로 유지하며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조밀하고 탄탄하게 구성된 현악파트와 매끄러운 테크닉으로 강렬함을 선사했던 금관파트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연출을 맡은 오이다 요시는 세계적인 배우이자 연출자로 알려져 있다. 메탈릭한 색감과 거울을 통해 표현되는 무대는 작품을 시공간을 초월해 바라보도록 만들었지만, 이동식 무대 활용을 위해 등장하는 스태프들은 분라쿠(일본의 대표적인 전통인형극)의 인형 조종자처럼 자연스럽게 무대를 오가며 일본의 연극적 전통을 되살렸다. 화살을 날려 불상을 무너뜨리고 자신도 스러지는 무네요리의 마지막 모습은 상징적으로 처리되며 많은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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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다음날 가진 간담회에서 신국립극장의 예술감독이자 이 작품의 지휘를 맡은 오노 카즈시는 이렇게 밝혔다. “이시카와 준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절필에 가까운 활동을 보였고 전쟁 후 발표한 대표작이 이 작품입니다. 주인공 무네요리는 진정한 예술가의 길에 대해 처절하게 번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현실의 무네요리는 사라지지만 그의 시는 남게 됩니다.”
무네요리의 고뇌에 찬 방황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진정한 예술가는 무엇이며, 예술의 길은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 이것은 도쿄 신국립극장이 관객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이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 상명대 교수(yonu4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