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akaoTalk_20190108_142824829 | 0 | 김태호 테헤란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제공=조영섭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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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대를 풍미했던 복싱스타 중 한명인 김태호(68·성동체육관) 선배를 가끔씩 만날때마다 1970년 방콕아시안 게임이 떠오른다. 당시 한국은 총 18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는데 복싱경기에서만 무더기로 6개를 금메달을 따냈던 비화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재복서 김태호는 대경상고 1학년 때인 1968년부터 전국무대를 평정한 복싱신동이었다. 1970년 방콕아시안 게임 선발전에 고교생으로 유일하게 태극마크를 달았던 그는 언론에서 꼽은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밴텀급의 김태호는 171㎝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스트레이트가 동양의 특급이라 불릴 정도로 발군이었다. 강부영,서강일, 홍수환으로 이이지는 테크니션 계보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하이테크 복서였던 그는 마치 1980년대 허영모를 연상시킬 정도로 빼어난 기량을 지닌 고교생이었다. 후에 국내에서 김태호를 잡은 선수는 고생근과 서상영 단 두명일 정도로 안정된 퀄리티를 지니고 있었다.
| 사본 -70년 방콕아시안게임 박형춘 김현치 김태호(좌측부터) | 0 |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박형춘 김현치 김태호(왼쪽부터) /제공=조영섭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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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당시 아시안게임에 단장으로 선임된 고 장덕진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태릉선수촌을 방문했다. 장 회장은 복싱선수단을 향해 한국이 종합2위를 차지할 경우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에게 한해 당시 집 한 채 값인 10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한마디에 18세 소년 김태호부터 30세 노장 박형춘으로 구성된 11명의 복싱태극전사들은 금메달을 획득하면 집 한 채 값의 현찰이 수중에 들어온다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하달되자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치 달릴 준비를 하던 마라토너가 옷을 벗어 던지듯 모든 선수들이 잡념과 망상을 모두 집어 던지고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외쳤던 것이다. 저녁 무렵이면 태릉선수촌 담장을 넘어 거나하게 한잔걸치고 들어오던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고 지용주도 연습벌레로 환골탈태하며 대변신, 마치 신들린 여인처럼 빽을 치면서 금메달을 향해 집중력을 발휘했다.
장덕진 회장이 왜 예정에도 없는 당근책 카드를 꺼냈을까? 부연설명을 하자면 1970년 12월에 벌어진 방콕아시안게임은 당시 한국은 돈이 없어 스스로 대회를 반납하면서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한 이른바 아시안게임 흑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개최권을 넘기며 반납비까지 물으면서 내린 결정였기에 대회 성적으로라도 만회해 실추된 국가위신을 만회하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운 북한이 1·21사태,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푸에블로 납치사건 등 연이은 도발로 촉각이 곤두서있었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스포츠를 통해서 확실한 우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국가대표 선수명단은 LF 김충배, F 지용주, B 김태호, FE 김성은, L 김현치, LW 김사용, W 정영근, LM 박형석, M 조원민, LH 박형춘, H 김상만 등 11체급의 국가대표선수로 구성되어 있었고 박형석과 박형춘은 형제복서였다. 이 멤버는 박구일, 손영찬, 김덕팔, 서상영, 엄규환, 이홍만, 이금택이 포진된 4년 전 아시안게임 멤버에 비해 전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중론이기도 했다.
| 사본 -74년 테혜란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강훈하는 김태호 | 0 | 19774년 테혜란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강훈하는 김태호 /제공=조영섭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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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2월 드디어 제6회 아시안게임이 방콕에서 열렸다. 당시는 중국이 본선에 참가하기 전이라 일본의 일방적인 독주가 펼쳐지는 가운데 한국과 태국, 인도, 말레이시아가 2위권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4년전 아시안게임에서도 일본이 금 78개로 1위를 차지했고 한국과 태국이 금메달 12개로 2위권을 형성했었다. 대회가 시작되자 한국 복싱팀은 100만원의 타이틀이 걸린 이 대회에서 승승장구하며 결승에 무려 7명이 진출했다. 당근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결승전에선 LF 김충배, F 지용주, FE 김성은, L 김현치 W 정영근 LM 박형석이 차례로 링에 올라 6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리고 화룡점정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LH 박형춘이 링에 올랐다. 상대는 4월 아시아선수권에서 박형춘이 RSC로 꺽은 태국의 마니트리 아룬족이었다. 당시 태국은 반한 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다. 1966년 대회에 이어 징검다리형식으로 연속 대회를 개최하면서 누적적자가 심해지면서 한국선수 경기마다 태국관중의 심한야유가 터져나왔다. 박형춘은 태국선수와 경기에서 시종일관 일방적으로 공격을 가했지만 2회전에서 상대의 버팅으로 눈에 상처를 입었다. 이에 태국선수에게 RSC승을 선언하면서 금메달을 도둑맞았다. 상대에게 실격패가 선언되어야 하는 상황이 반전되며 금메달 행진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11체급에 출전했던 한국 복싱은 금6 은1 동2개의 역대최고의 성적을 냈다. 후에 금메달리스트들에겐 현금 100만원 대신 APT분양권이 지급됐다. LM에서 금을 획득한 박형석은 아쉽게 은메달에 머문 친형인 박형춘에게 APT분양권을 양도해 훈훈한 형제애를 과시했다. 한편 동메달에 머문 김태호는 2년 후 뮌헨올림픽에 참가한데 이어 4년 후 테혜란 아시안게임에서는 심기일전해 박찬희, 유종만 후배와 함께 금메달을 획득하고 APT분양권을 얻는다.
| 사본 -74년 테혜란 아시안 게임 금메달 리스트 | 0 | 1974년 테혜란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김태호, 유종만, 박찬희(왼쪽부터) /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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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상가 한비자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동기부여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 갈파했다. 당근정책이 인간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