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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브란트는 한마디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세계의 언론들은 ‘무릎 꿇은 것은 한 사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폴란드 정부는 바르샤바 시내에 브란트 광장을 조성하고 무릎 꿇은 브란트의 모습을 새긴 동판 기념비를 세웠다.
독일의 도덕적 반성은 브란트의 무릎 꿇음에서 그치지 않았다. 2013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나치 강제수용소였던 뮌헨 인근의 다하우 추모관을 찾아 “독일인 대다수가 아우슈비츠 대학살에 눈을 감았던 데 대해 깊은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또다시 참회했다.
1급 전범들의 위패가 진열된 야스쿠니 신사에 총리와 각료들이 집단 참배하는 일본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독일의 거듭된 사죄는 마침내 이스라엘과 유럽 피해국들의 피 끓는 분노, 솟구치는 증오를 가라앉혔다.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는 전용차를 미국산인 캐딜락에서 독일산인 베엠붸(BMW)로 바꿨다. 도덕성을 회복한 독일은 참회의 빛으로 양심의 빚을 갚은 것이다.
일본도 과거에 사죄의 담화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한일강제병합이 ‘강압적인 배경에서 체결’되었음을 자백했고, 무라야마 전 총리도 “일본이 과거에 한국 국민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준 것에 대해 깊은 반성과 유감을 표명한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일본의 고위 관리와 지식인들은 식민지근대화론을 들먹이며 과거의 죄악을 정당화하는 행태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의 식민지화는 역사적 필연’ ‘독도는 일본 영토’ ‘종군위안부는 없었고 공창(公娼)만이 있었을 뿐’ 따위의 역사왜곡 망언도 쉴 새 없이 쏟아낸다. 물론 선대의 죄악을 부끄러워하는 양심적인 일본인도 적지 않다. 혐한(嫌韓)시위대의 앞을 반(反)혐한시위대가 막아서곤 한다. 문제는 국수주의적 정치인과 그들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부도덕한 극우세력이다. 어두운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저들에게 도덕적 양심의 깨우침이 필요하다.
현재의 동북아 정세는 북핵 폐기 문제로 초긴장 상태다. 북·미가 비핵화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완전하고 영구적인 핵 폐기에 대한 북측의 진의는 확인할 길이 없다. 더욱이 북한의 뒤에 중국이 버티고 앉아 협상을 사실상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의심은 이미 비밀도 아니다. 미국과의 대결에서 북한을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중국과 이를 지원하는 러시아 등 옛 공산권의 전체주의 독재체제, 그에 맞서 중·러의 아시아 패권(覇權)을 저지하려는 한·미·일의 자유민주주의 공화체제, 이 두 세력이 한반도에서 불꽃 튀는 신 냉전을 벌이는 중이다. 이 냉전은 언제 열전으로 돌변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 한·미·일의 결속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청되는 시기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사이의 깊은 골은 좀처럼 메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부정직한 태도에 있음이 분명하다.
광복(光復)은 어두움을 벗어나 빛을 되찾는 것,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다. 외적의 침략에서 해방된 자유는 주권의 광복이고, 침략의 죄과에서 해방된 자유는 양심의 광복이다. 유럽의 침략국 독일은 도덕의 빛에 무릎 꿇은 양심의 광복으로 홀로코스트의 멍에를 벗어가고 있다. 아시아의 침략국 일본이 반문명적 범죄의 역사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뒤늦게나마 도덕의 빛 아래 엎드려 마비된 양심을 일깨워야 한다. 일본 총리가 평화의 소녀상 앞에 참회의 무릎을 꿇는 날, 일본은 그제야 양심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날이 일본의 광복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