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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뒤 A는 종전 회사 직속 상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상사는 노발대발했다. B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A와의 통화내용을 녹취한 서류가 증거로 제출됐다는 것이다. 녹취서를 보니 별다른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이 그대로 활자화돼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고 변명하기도 궁색했다. 종전 회사에서는 A를 입이 가벼운 배신자 취급을 했고, 곧 업계에 소문이 금방 퍼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선의로 나눈 대화를 동의 없이 녹음하다니….’ A는 B가 너무 괘씸하고 불쾌했다.
위 사례는 대화 당사자가 상대방의 동의 없이 대화내용을 녹음한 것이다. 대화자 사이의 비밀녹음은 통신비밀보호법상 처벌대상인 감청이 아니고, 비밀녹음을 푼 녹취서는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확립된 판례다. 이 때문에 ‘몰래 녹음해도 괜찮다. 재판에서 이기려면 비밀녹음도 증거로 써야 한다’는 것이 상식처럼 통용된다.
그러나, 대화를 나눈 당사자라고 해도 상대방 동의 없는 비밀녹음이 합법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몰래 녹음해도 괜찮다’는 말은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일 뿐이다. 미국과 유럽 등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는 통화 상대방의 동의 없는 비밀녹음이 적어도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본다. 케이스가 많지는 않지만 우리 법원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위 사례에서 법원은 B에게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고, 위자료 300만원을 지급하라고 명했다. 법원은 A의 동의 없이 통화내용을 비밀리에 녹음하고 이를 재생해 녹취서를 작성하는 것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음성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불법행위라고 봤다. B는 녹음된 통화내용이 A의 사생활과 관계가 없고 A의 진술이 사실상 유일한 증거방법이었으니 정당하다고 항변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증거방법을 강구하지도 않고, 게다가 A가 당사자도 아닌 소송에 녹취서를 증거로 제출해 A의 발언과 개인적 신상이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정당한 변론활동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사실 상대방 동의 없는 비밀녹음이 떳떳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수긍한다. 더구나 A는 소송상대방도 아니었다. 원치 않게 대화내용이 공개된 당사자는 불쾌감 등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을 수 있고, 난감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정당한 내 권리를 찾기 위해, 재판에 이기기 위해 위자료 정도는 감수하겠다면 모르겠으나, 위법인지도 모른 채 비밀녹음이 광범위하게 권장되는 추세는 자제될 필요가 있다. 통화시 녹음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해보자. <최정규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