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판엔 강제 노동 모호하게 기술
작업장 인근 조선인 여성 데려와 위안소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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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로대본영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 말기 일왕을 비롯해 정부 주요 기관의 거처를 안전하게 옮기기 위해 건설한 거대한 비밀 지하기지다.
나가노역에서 버스로 40분 정도면 도착하는 곳으로 신사와 고택이 있어 어르신 관광객들이 찾는 정도의 한적한 마을이다.
전쟁 말기 일본 내 만들어진 지하기지 중에서 가장 큰 규모지만 일본들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하호 입구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일본인 몇명이 입구 옆에 세워진 ‘조선인희생자추도평화기념비’ 위령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든위크(5월 초 일본 연휴)를 즐기기엔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 앞에 표정이 진지해졌다.
지하호 내부는 촘촘하고 거대한 미로였다. 전체 약 6km 길이로 동서 방향으로 20개 터널이 이어져 있다. 굴의 폭이 약 4m, 높이 3m로 패전 즈음 80%가 완성됐다고 한다.
현재 안전상의 이유로 500m 가량만 공개돼 있다. 걷다보면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시킨 구멍이나 달구지의 흔적 등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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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1월 시작된 대본영 건설 작업의 최일선은 대부분 조선인들이 맡았다.
암반을 뚫는 발파 작업 등 ‘막장’ 노동이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7000명 이상이라고 전해진다.
현재까지도 대본영 공사의 희생자 수는 밝혀져 있지 않다. “많은 날에는 5~6명이 죽었다”는 증언도 있으나 사체 매장 장소도 알려져 있지 않다.
지하로 이어진 길을 깊숙이 걷다보면 ‘대구부(조선 말기 대구 지역 명칭)’ 등의 한자가 새겨져 있어 고향을 그리워하는 조선인의 한이 전해진다.
조선인 숫자에 대해서도 간부급이었던 4명의 이름만이 남아 있다. 안내판에는 조선인·일본인 등이 강제 동원됐지만 전부 강제는 아니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2년 전인 2014년 11월 나가노시가 안내판에 조선인 강제동원과 관련한 문구를 ‘전부가 강제는 아니었다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문구를 넣어 역사 물타기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주변 민가 빌려 위안부 위안소 설치…“강제로 끌러왔다” 증언 남아
일본은 작업장 주변에 있는 민가를 빌려 조선인 여성을 데려와 위안소로 썼다.
정부에 건물을 빌려 줄 수밖에 없었던 K씨의 증언에 의하면 1944년 가을까지 조선인 여성 4명이 위안부로 끌려왔으며 모두 스무살쯤의 젊은 여성이었다고 했다.
손님은 일본인이나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었던 조선인이라고 했다.
실행위가 밝힌 또다른 증언에 의하면 ‘가네모또준코’라는 일본 이름의 위안부 여성은 경남 출신으로 ‘읍관리 사람들로부터 특수감호부가 됐다는 말을 듣고 강제로 일본에 끌려왔다’고 얘기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위안소로 쓰인 민가는 91년 철거됐으나 현재 시민단체 ‘또하나의 역사관-마쓰시로 건설실행위원회(가칭)’가 해체된 자재 일부를 역사관 안에 보관하고 있다. 이 단체는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비판하며 위안소 자료를 역사적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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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가노 마쓰시로였을까. 지역적으로 500m 높이의 완만한 산으로 둘러싸인데다 군사 시설을 짓기에 적당한 암반, 가까운 곳에 비행장이 위치, 일왕의 품격에 맞는 땅이었다는 평이다. 나가노의 옛 이름 신슈(信州)가 ‘신의 나라(神州)’와 비슷한 발음이란 점도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일본은 정부 지하기지 이외에 일왕을 위한 별도의 지하 공간과 반지하 콘크리트 건물도 지었다. 일왕과 황후가 쓸 ‘목욕탕(お風呂)’은 물론 지하에서 타고다닐 일왕의 차량도 개발했다.
역사관 관계자에 따르면 이곳은 철저하게 조선인들이 손을 못대도록 했다. 성경험이 없는 일본인 젊은 남성만이 일왕의 거처 공사에 관여했다고 설명했다.
왕을 천황이라고 부르는 일본이 체제 유지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