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의 부재로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 시대, 세간의 이슈와 맞물려 화제가 되는 책이 있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다각적인 시각에 투영한 '거꾸로 선 피라미드'(권해상 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정파적인 이해에 따라 행동하는 권력과 리더십의 문제를 지적한다. 또 대한민국이 가진 상처를 이야기하며 어떻게 치유해 나가야 하는지도 말하고 있다.
완장 찬 돼지들의 축제가 어떻게 엉망이 됐는지, 우리의 리더십은 왜 이렇게 엉망이 된 것인지에 대해 묻고 답하며 이제는 새 판을 짤 시간이라는 일갈이 주는 울림이 크다.
기획재정부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에서 경력을 쌓은 정통 경제관료 출신이라는 저자의 이력이 글에 힘을 더 실어줬다. 또 흔히 쓰는 뻔한 패턴의 고루한 글도 아니다. 저자가 관료로 재직하면서 가장 경계해 온 것은 자신의 행동이다. 그 행동이 생각지 못한 파급력을 행사하며 무지 혹은 '생각없음(Thoughtlessness) 병'이 되지 않도록.
실제로 저자는 한국자금중개 사장으로 일할 때 직원들에게 '생각없음 병'을 조심하라고 강조했다. 상사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으로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바로 관료의 고질병인 '생각없음 병'이라 꼬집는다. 조직 구성원들이 옳은 방향성을 갖고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민간 회사의 직원뿐 아니라 관료, 나아가 온 국민에게도 적용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저자는 유대인을 학살한 후 법정에 서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던 아이히만의 사례를 토대로 생각없음 병의 서늘한 결과를 지적한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나는 주어진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며, 명령을 받은 대로 했을 뿐입니다."
<뉴요커>의 기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을 참관하고 놀란다. 아이히만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 그리고 파시즘의 광기로든 뭐로든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 뿐이다"
사실 국정농단 사태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저자가 이 이야기를 꺼내든 것은 뼈아프고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는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일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한탄한다.
[올바른 목적의식이 없는 조직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할 수 없다. 자신들이 가야 할 방향을 모르는데, 사람을 귀히 여길 리 없다. 인화의 중요성을 모르는 조직은 어느새 이윤 극대화가 목적이 된다. 그렇게 되면 기업은 자본가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도구로 이용된다. 사람들은 이윤을 창출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착취의 대상이 된다.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의 권익을 위해 봉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유지, 눈앞의 성과 창출, 선거 표몰이에만 신경 쓴다. 그래서 국가의 지속가능한 성장은 요원한 일이 된다. 현재에 천착하면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미래만 생각하면 현재가 희생된다. 결국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 p.168]
현재에 천착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 그는 이 시대야말로 길이 사라진 눈밭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비틀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개인은 어느새 자기 자신도 잃고 길도 잃었다. 인간으로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동력을 잃은 것이다.
그렇다면 길을 잃은 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문제 해결의 시작은 우리가 길을 잃었음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짚는다. 이제 상처를 내보이고, 고통을 다독이기 위해 발을 내디뎌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상처가 있다고 모두 진주가 되진 않지만, 상처 없이 만들어진 진주는 없다. 상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성공은 무수한 실패의 무덤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며, 해결책도 불행과 실패 속에 숨어 있다. ‘난세는 신의 선물’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열광한다. 하지만 그가 그 길을 가기 위해 겪었던 갈등과 그 길 위에서 만난 숱한 외로움과 좌절에 대해서는 짐작만 할 뿐이다. 보이지 않는 고군분투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p.86]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눈밭에 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한다. 눈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쌓인 눈이 녹으면 옛길을 따라가는 방법과 눈밭을 헤치고 나오는 방법이 있다.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한편, 저자 권해상은 지난 1980년 행정고시 24회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후 경제기획원, 대통령 혁신관리비서관, 지역발전위원회 기획단장,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대표부 공사 등을 지내고 한국자금중개 사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자문위원으로 근무하면서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더 살롱'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가격 1만4000원. 메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