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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은 중국 송나라(1127-1279) 시대의 학자 주희 (1130-1200) 가 설립한 철학 체계를 이르는 말로, 이는 이후 중국과 조선 왕조 건국의 기반이 됐다. 주자학은 형이상학과 인식학을 합성한 접근법으로, 자연세계와 통치 세계 그리고 윤리 영역을 포용하는 세계관을 창조하기 위해 초기 유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형이상학적 용어를 결합한 것이다. 주자학의 세계관은 실질적으로 조선시대(1392-1911)에 행해진 거의 모든 정규교육의 토대가 됐다.
어쩌면 지난 100년 동안 동아시아의 가장 큰 실패는 현시대 정책과 거버넌스, 교육, 도덕성과 법에 대한 논의를 위대한 주자학 전통에 비추어 재해석할 수 없었던 우리의 무능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주자학 자체가 역사교과서의 몇 줄에 불과할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일반적인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크게 노출이 되지 않다 보니 주자학 전통은 한국의 근대화를 가로막고 우리가 서구화되고 발전된 환경을 위해 극복해야만 하는 엄격하고 유연하지 못한 유교적 사회질서로 연관되곤 한다
이 잘못된 믿음은 근대화의 ‘실패’가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주된 원인이자 주자학 전통이 한국의 최대약점으로 여겨지는 한국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주된 내용은 주자학 전통이었던 추상적 이론과 원칙, 그리고 조상들의 가르침에 대한 맹목적 충성에 사로잡힌 양반들의 실수로 한국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는 곧 근대화 실패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은 주자학 전통이라는 모호한 학문으로부터 만들어진 자아와 사회에 대한 추상적 이론과 비현실적인 사고에 사로잡혀있었다고 주장되고 있다. 즉, 양반들은 ‘덕’과 ‘효’에 대한 주자학의 고지식한 추상적 관념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더 이상 국가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노하우나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필요한 기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실용학문의 중요성을 간과했습니다. 그들은 종일 책을 읽으며 사회에는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한국은 근대화에 뒤쳐졌으며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이후에야 서구과학이 도입되고 실질적인 국가성장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믿음은 ‘서양의 문화와 기관, 즉 17세기 유럽에서부터 이어져온 거버넌스의 배경철학, 윤리, 그리고 과학과 논리에 대한 접근방식이 곧 우월한 전통이자 근대성의 유일무이한 조상이며, 문명화로 향하는 필수적이고 긍정적인 단계이다’라는 가정이 뒷받침한다. 이 주장은 (18세기 이후) 기계공학이나 (19세기 이후) 의학분야의 경우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한중일 3국은 18세기 이전에 훨씬 더 복잡미묘한 공공 분야가 있었으며 유럽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훌륭하게 광범위한 분야의 지식인을 정책과정에 참여시켰다. 또한 문해력에 대한 가치가 더 높았고 19세기 이전 문맹률은 유럽보다 동아시아가 더 높았다.
◇오늘날의 문제와 맞서다
오늘날 우리가 맞서야 하는 문제는 오히려 주자학 전통에서 발견한 소중한 지혜를 오늘날의 사회, 즉 소비와 충동적인 욕망으로 얼룩진 지속불가능하고 근시안적이며 인간의 공통된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는 사회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 일은 오늘날 냉엄한 현실의 두 가지 문제점으로 더 시급해지고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서양 전통의 도덕적 와해다. 만약 서양의 고급기술과 정교한 관리기관이 문화제도에 대해 아시아 수준으로 심도 있게 재고했더라면, 오늘날의 환경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서방이 만들어낸 극단적 보수주의는 문화나 과학 또는 윤리적 규범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으며, 비합리적이며 반과학적이다. 이 새로운 문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거버넌스를 하기 위한 이들의 근시안적이고 본능에 호소하는 저속한 접근방식이다. 오히려 서구문명은 점점 급진적인 소비문화와 세계전쟁, 그리고 더 진부하고 추상적인 표현문화와 가까워지고 있다. 학교에서 우리는 19세기에 한중일이 근대화에 실패했고 프랑스와 영국, 독일은 급속도로 성장했다고 배웠지만 현재 서구 문명은 아시아에 비해 더 의문스럽고 잔인하고 야만적이다.
지속가능성과 환경보전을 강조하며 미래를 생각하는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은 오히려 아시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자학 전통에서 유념, 윤리와 거버넌스가 가장 정교하게 결합돼 있다.
우리는 재해석된 주자학 전통이 현대 정치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오늘날의 위태로운 거버넌스와 극단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공무원심사제도를 통해 거버넌스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안하여 서방 사회가 활력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정신적 황폐에 빠져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영혼에 공허함을 주어 우리를 생각 없는 소비주의로 이끈다. 이 극심한 위기는 우리가 하는 사회개혁의 노력을 위축시키고 불가피하게 끔찍한 모순을 낳게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사회정책에 관하여 단지 기술적이고 관료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뿐,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관리와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는 진부한 ‘혁신’과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있고, 이는 현실과 관련이 없고 이 시대의 심리적, 정신적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주자학은 정신적 계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종교가 아닌 거버넌스와 실질적 행정 문제를 다룬다. 이것이 현 시대에 필요한 이유는 방종하고 세속적인 근대종교를 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자학은 배타적이지 않다. (타 종교나 철학적 신념을 버릴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잘못 분리되어 있는 실천과 정신적인 인식, 개인 윤리와 훌륭한 정부를 하나로 화합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측면이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우리 삶에 미치는 사회 변화의 심적, 정신적 영향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다양성으로 인해 논쟁이 종교적으로 치닫지 않게 해야 한다.
주자학 전통은 거버넌스 뿐만 아니라 도덕성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간 경험의 심적, 정신적 측면에 대한 보다 솔직한 논의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주자학은 거버넌스 또는 인간 관계가 단순히 효율성이나 재주의 문제가 아닌 정부를 운영하고, 가계를 운영하고, 사회관계가 발전하는 방식으로 보기 때문에 항상 윤리적인 문제이자 한 체제의 구성원 모두가 서로에게 하는 약속을 수반하게 된다. 유교 체제에서 일방적인 행동은 없다.
주자학 전통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 급속한 기술의 발전에 적용할 수 있는 여러 가치가 깃들어 있다. 우리는 기술이 얼마나 세상을 변화시켰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기술의 진화는 우리가 인지하는 방식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 기술은 사회의 기초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세상을 효과적으로 이해하려면 모든 현상의 밑바탕이 되는 원리의 형이상학을 인식해야 한다. 주자학 전통은 어쩌면, 비록 필자가 이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다뤄보진 않았지만, 인류사회가 기술 진화에 적절히 대처하고 인류사회의 미래를 위한 다른 어떤 전통보다 높은 차원의 장기적 계획수립에 필요한 체계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 재현되는 시각적 이미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기본 원칙이나 형이상학적 존재보다 점점 더 많은 중요성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 이른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피상적인 이해만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함정에 갇혀 있으며 우리의 인식지평은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2차원적인 세계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눈으로 보는 모든 현상 뒤에 있는 형이상학 존재를 가늠하는 지혜다.
주자학 전통은 현대사회의 이런 결함을 짚어 효과적으로 다루고 있다. 눈에 보이는 사물 반대편에 서서 세상이 돌아가는 근본원칙을 파악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겉모습이 절대적인 시대에서 통찰력은 아주 중요하다.
분명히 주자학 전통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분석함과 동시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한 차원 더 높은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기술의 진화는 현실세계의 이미지를 혼란 시켜 현대 사회를 혼돈에 빠뜨렸고 우리는 추상적인 원칙 대신 보여지는 이미지에 치우치는 안 좋은 습관을 만들게 됐다. 우리가 전례 없는 문제들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원칙과 정책을 만들고자 한다면 주자학 전통은 우리에게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가르침을 많이 전해 줄 수 있다.
◇ 퇴폐주의의 도전
진실을 직면하자. 현대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테러리즘도 아니고 경제 침체도 아니며 특정 정치인들의 행동도 아니다. 최대 위협은 바로 우리 문화에 확산된 퇴폐주의다. 오늘날 개인은 국가의 미래에 대해 별로 염려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음식, 음주, 성적 쾌락, 휴가와 스포츠를 무분별하게 탐닉한다. 삶의 목표는 순간적인 쾌락이 되어버렸고 희생이란 가치는 잊혀졌다. 이것이 전형적인 퇴폐주의다.
안타깝게도, 시장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잘못된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는 인간의 원시적인 욕구를 불러일으켰고 젊은이들에게 욕망을 멋진 경험으로 위장했다. 우리는 전통적 유교사상이 주장하는 합리성과 자제력, 그리고 마음가짐을 한 마리의 풀어놓은 짐승으로 대체했다.
텔레비전 속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입안으로 많은 음식을 꾸역꾸역 먹어대고 있고, 수많은 광고에는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포르노그래피로 금지되었을 만한 야한 옷을 입은 여자들이 나온다.
이는 제품을 판매하는 전략일 수 있지만, 모든 분야의 거버넌스를 저해하는 도의의 퇴폐를 불러일으킨다. 결과적으로 정책은 국가의 복지나 안보 또는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금정적 풍요와 권력을 모으기 위한 기회로 변질됐다.
만약 사회 전체가 이 퇴폐주의에 빠진 것이라면, 이 문제가 경제 정책이나 기술 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도 주자학 전통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 문화와 건강한 습관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과 퇴폐의 성격과 그 치료법에 대해서도 많이 쓰여있다. 무엇보다 주자학 전통이 강조하는 것은 도덕적 행동의 원동력인 수치심(shame)의 중요성이다. 수치심을 상실한 것이 현대 사회의 비극이었다.
전통적 사회에서 특정 행동은, 이를테면 노부모를 유기하는 행위 등을 수치스럽고 잘못된 것으로 여겨졌다. 도덕적 명령은 내면화되었지만 수치심으로 형태화됐다. 유교의 가르침에 “군자필신기독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혼자 있을 때에도 반드시 신중하게 행동한다 ”는 뜻이다. 윤리는 남이 지켜보든 아니든 자신이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수치심이라는 전통적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녀를 잘 돌보고 직장에서 주어진 업무를 다하는 것이 도덕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이나 혹은 주변인들의 행동이 사회 전반에 어떤 윤리적 의미가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자학은 우리의 부서진 교육체제에 많은 것을 전해줄 수 있다. 교육은 산업이 되어 더 이상 배움에 대한 가치가 없어졌으며, 지식의 정신적, 영적 측면은 탐구할 수 없게 됐다. 오히려 학위는 직업을 찾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으로 전락했고 아이들이 받는 교육은 단지 추상적인 ‘노동력’의 가치를 높이는 수단이 됐다.
그러나 주자학에서는 교육자체가 스승과 제자 모두에게 도덕적인 행위로 보고 있다. 스승은 제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미래의 노동력을 최대로 향상시켜주는 것도 아니다. 이 과정에는 스승과 제자간의 평생 갈 수 있는 유대관계가 필요하다. 가르침과 배움의 모든 측면은 주자학 전통에서 ‘존경’이라는 영적 의미가 담겨있다. 배우는 행위는 해석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 공동체 속에서 윤리적 거버넌스에 대한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이는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부족한 측면이기도 하다.
◇ 인식과 환경
마지막으로, 주자학 전통은 분별없는 소비문화에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제품을 소비하거나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유학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상상해보자. 그는 책을 읽고 편지와 에세이를 썼다. 고전을 다시 써보며 그 글의 뉘앙스를 잘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는 매우 적은 생활용품만을 사용했고 매우 절제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표면적인 의미가 아닌 근본원리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므로 그가 읽는 책 속에서 무한한 깊이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오늘날 국제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도전은 선진국에서 엄청나게 낭비되고 있는 천연자원을 줄이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더 좋은 차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 더 큰 집에 살고 싶은 욕구, 음식을 과하게 먹고 싶은 욕구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과소비는 행복의 준다’는 믿음아래 끊임없이 소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비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몇 권의 책에서 깊은 깨달음을 찾아내는 유학자 모델은 소비문화의 위기와 그에 따른 기후 변화를 겪고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지구 환경의 엄청난 피해는 소비문화의 정점을 찍고 있는 선진국들로부터 온다. 우리가 소비를 급격하게 줄이지 않는다면 아이들에게 지속 가능한 환경을 물려줄 수 없을 것이다.
환경 파괴의 또 다른 요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디지털 표현의 시대에서 인과관계라는 행동간의 연관관계를 인지 못하게 된 점이다. 더 이상 우리는 매일 하는 일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의 관계를 명확히 볼 수 없게 됐다. 심지어 서로 관련이 종종 이 부분을 잊곤 한다.
우리는 카페에 앉아있을 때에도 일회용 컵에 커피를 마시며 이것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그리고는 카페 종업원을 건방지고 무례한 태도로 대하면서 이런 태도가 우리 문화를 타락시킨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찬란한 유교전통의 최고점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궁극적으로 도덕적인 행위임을 인식해야 한다. 책을 읽고, 식사를 하고,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이 모든 행동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가 삶의 도덕적 의미를 다시 찾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건전한 정치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인간 본성을 바꿀 수는 없지만, 수준 높은 윤리적 행동을 모든 삶에 적용하는 문화를 재정립하는 방식으로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