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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사진=조준원 기자 wizard333@ |
걸쭉한 육두문자와 장정들도 손쉽게 제압하는 싸움 실력, 딸을 향한 애끓는 모성애와 악을 처단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적극성까지. 통통 튀는 발랄함과 상큼한 외모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든 국민들에게 사랑 받았던 90년대 최고의 청춘스타 김희선에게서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김희선은 최근 종영한 MBC 수목드라마 ‘앵그리맘’(극본 김반디, 연출 최병길) 이와 같은 연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며 편견을 깨고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김희선은 ‘앵그리맘’에서 소위 ‘일진’ 출신의 밥집 아줌마 조강자 역을 맡았다. 어느 날 강자는 딸 오아란(김유정)이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고를 해봤자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했다. 결국`그는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등학생 신분으로 학교에 뛰어들었다.
아무리 불혹을 목전에 둔 나이라고는 해도 한 시대를 풍미하는 청춘스타였던 김희선이, 심지어 여전히 2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화사한 외모를 지닌 그가 고등학생 딸을 둔 ‘억척 엄마’ 연기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나무랄 데 없는 연기로 호평을 받긴 했지만, 분명히 애로사항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희선의 대답은 다시 한 번 예상을 빗나갔다.
“어떤 식으로 엄마 연기에 임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모르겠어요. 굳이 연기를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평소 제 딸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그대로 그려내면 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기 때문에 부담감이나 어려움 같은 게 전혀 없었거든요. 특히나 ‘앵그리맘’에서 다룬 이야기가 충분히 제 딸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더 몰입하기 쉬웠어요. 그보다는 오히려 ‘이 나이에 교복을 입어도 괜찮을까, 학교에서 아이들이랑 잘 섞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더 컸어요.(웃음) 유정이 옆에 있으니까 나이가 들어 보이더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사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제가 대학교 때 딸을 낳았으면 유정이 나이인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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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앵그리맘’은 통쾌한 액션 활극을 표방했지만, 사실 이 작품의 분위기는 유쾌하기보다는 어두운 쪽에 가까웠다. 단순한 학교폭력이 아닌, 학교의 어두운 이면에 숨겨진 비리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내 시청자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기도 했다. 무거운 이야기를 너무 무겁지만은 않게, 하지만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게 풀어내야 하는 것이 제작진과 배우들의 숙제였다.
“수위를 조절하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실제로도 예측할 수 없는 문제점에 맞닥뜨리고, 공권력에 호소해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해 고통 받는 시민들이 많이 있잖아요. 지하철 화재나 백화점 붕괴 사고, 여객선 침몰 사고 등을 겪은 분들도 있고요. 그런 문제들을 실제로 겪은 주인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진지하면서도 너무 무겁지는 않게 그려내야 했죠. 학교 붕괴 장면을 찍을 땐 정말 괴로웠어요. 무너진 게 스티로폼 벽이고 학생들도 모두 분장을 한 채 쓰러져 있는 연기를 하는 것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 입장에선 마음이 좋지 않더라고요.”
그렇다면 반대로 연기를 하면서 가장 즐거운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묻자 김희선은 망설임 없이 “액션 연기가 정말 최고였어요”라며 두 눈을 빛냈다. 일진 출신이라는 설정 때문에 좀처럼 시도할 기회가 없었던 액션 신들을 직접 소화해낸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 추억으로 남은 듯 했다. 극 초반 큰 화제를 모았던 나이트클럽 격투 신의 경우, 김희선을 대신할 예정이었던 스턴트우먼이 리허설 도중 부상을 당해 본의 아니게 김희선이 모든 장면을 직접 소화해낸 것으로 알려졌다.
“늘 작품 속에서 위기에 처하면 남자 주인공이 저를 구하러 왔기 때문에 제가 직접 액션 연기를 할 일은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직접 해보니, 남자 배우들이 왜 액션 연기를 좋아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사실 제가 남자를 상대로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리고 발로 차며 싸운다고 해도 어설프게 흉내를 내는 수준밖에는 안 되는데, 편집의 힘 덕분인지 모니터링을 해보니 제법 그럴싸하게 잘 나오더라고요. 감정 연기는 조금만 주의가 흐트러져도 그 장면 전체가 다 망가져 버리는데, 액션 연기는 그런 게 없어서 오히려 편하고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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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이 ‘앵그리맘’을 통해 얻은 것은 연기 변신에 대한 호평만이 아니다. 김희선은 아마도 지금까진 그를 잘 몰랐을 중·고등학생들이 이제는 길에서 마주치면 “조방울(조강자의 고등학생 이름)이다!”라고 외친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앵그리맘’ 이후로 팬 카페에 10대 팬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며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설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든다는 건 모든 배우들이 느끼는 점이에요. 이 시장 자체가 그런 곳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런데도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정말 행복해요. ‘앵그리맘’과 같은 작품을 계기로 저 같은 배우들도 이런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드렸다고 생각해요. 김희애 선배님이나 김혜수 언니 같은 분들이 워낙 길을 잘 닦고 계시긴 하지만, 저희처럼 나이가 들기 시작한 여배우들이 편하게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