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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조작된 신화 보천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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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재 기자

승인 : 2015. 03. 16. 06:00

무차별 양민 살해·방화·약탈, 항일투쟁과 거리 멀어
주역도 북 김일성 주석 아닌 37년 10월 사살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
北 보천보혁명전적지 견학
북한은 1937년 보천보 사건을 김일성 주석의 최대항일무장투쟁으로 선전하고 있다. 사진은 노동신문이 보도한 보천보혁명전적지 견학사진/출처=노동신문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 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1편

현재 북한이 선전하고 있는 김일성 주석의 최대의 항일무장투쟁인 ‘보천보 전투’(1937년 6월 4일)는 김주석 자신이 아니라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다른 김일성이 이끌었고 전투의 성격도 항일무장투쟁이라기보다 당시 국경지대에 빈번했던 비적들의 약탈행위 수준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보천보 사건으로 구속된 피의자들에 대한 △재판판결문(1937년 함흥지방법원)과 △중국 공산당의 조선 내 항일인민전선 보고서 등 1937년 당시 1차 자료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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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보천보 사건으로 검거된 피의자들에 대한 일제 함흥지방법원 재판판결문
현재 북한에서는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무장투쟁인 ‘청산리대첩’과 ‘봉오동 전투’는 아예 기록조차 없애버리고 이 보천보 전투를 민족 최대의 항일무장투쟁으로 선전하고 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 전투는 1937년 5월 하순 김일성이 주력부대를 편성, 보천보 일대를 정찰하고 공격준비를 마쳤을 때, 무산지역에 진출한 부대가 적의 공격으로 포위될 상황이 되자 당초 예정된 작전 개시일을 앞당겨 보천보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며 시작됐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공격은 1937년 6월 4일 밤10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150명이 2개의 습격조와 2개의 차단조, 1개의 정치공작조로 나뉘어 제1습격조는 일제 경찰관 주재소·면사무소·소방서를 공격하고, 제2습격조는 우편국·농사시험장·산림보호구를 습격하여 기관 건물들을 전소시키고 일제군경을 전멸시켰다.

한편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정치공작조는 김일성 작성의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포고문, 그 밖의 격문들을 뿌리면서 정치선전을 전개하였다. 포고문의 내용은 ‘조선인민들은 조선인민혁명군에 호응하여 일제 통치를 분쇄하고 조선인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또 조선인민혁명군이 이로써 국내 진공의 목적을 달성하고 철수를 하였는데, 철수시 많은 주민들이 이들을 도와서 노획물자 운반에 동참하고 가담을 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구시산과 간삼봉(間三峰)에서 추격하는 일본군을 또다시 격퇴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북한의 주장은 완전한 조작이고 날조로 밝혀지고 있다. 우선 이 때의 공격부대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이끈 부대가 아니라 모스크바대학 유학 출신의 또 다른 김일성이 이끈 부대였다. 또 부대 명칭도 ‘조선인민혁명군’이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제 6사’였다.

사건 뒤 일제 군경은 주모자들을 추적하고 국내 내응 조직에 대한 수사에 들어가 사건 관련자를 무더기로 검거했다. 일제 군경으로서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피의자 신문에서 사건의 주범인 동북항일연군 제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캐내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

2톤 트럭에 가득 찰 정도로 방대했던 피의자(501명) 신문 조서 속에 제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파악된 신원은 한 사람만 조사한 것이 아니라 501명이나 되는 방대한 관련자들을 입체적으로 심문한 결과기 때문에 대체로 정확하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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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일제의 함흥지방법원에서 작성한 보천보 사건 피의자 재판 판결문, 유격대 총사령부 총사령 사장 김성주라고 적시되어 있다. 이 김성주는 1901년생으로 함경남도 출생이고 모스크바 공산대학 유학했고 37년 11월 13일 양목정자(楊木頂子)에서 일·만군과 교전하다 전사했다. 북한의 김일성과는 한자만 다른 동명이인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1912년 평안남도 출생으로 길림 육문중학 중퇴의 학력이다.
이 신문 조서는 함흥재판소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1946년 초에 찾아내 현재 북한의 조선노동당이 가지고 있다.

이 피의자 신문조서와 ‘경성일보’ ‘매일신보’의 1937년 11월 18일자 보도에 따르면 보천보 사건의 주역 제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은 함경남도 출생, 1901년 생, 본명 김성주(金成柱),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다. 무엇보다 그는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다.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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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동북항일연군 제 6사장 김일성의 전사 소식을 전한 경성일보 1937년 11월 18일자 조간 7면 기사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평안남도 태생, 1912년생, 본명 김성주(金聖柱), 길림 육문중학 중퇴의 학력이다. 다만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이 보천보 전투에서 김일성 부대의 일개 병사로 참여했던 것 같다.

이 조서에 기록된 제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북한 김일성임을 입증해준다면 북한은 그것을 조선혁명 박물관에 전시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제6사장 김일성의 부하로 보천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박금철(朴金喆)은 사건 뒤 검거되어 무기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해방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와 평양에 김일성이 나와 있다는 말을 듣고 ‘제6사장 김일성’인줄 알고 달려갔다. 그러나 둘은 몰라봤다고 한다. 평양의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을 지휘했던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었던 것이다.

북한이 선전하고 있는 보천보 전투의 문제점은 당시 보천보가 인구 1,300여 명의 작은 마을이고 무장병력은 주재소 순사 5명뿐이었다는 사실이다. 북한 측 주장대로 일본군경을 전멸시킬 정도로 일본군 부대도 없었고 대대적인 전투도 아니었다.

사건 당시 일본 당국의 형사재판기록을 보면 습격 당시 주재소 안에서 야근 중이던 순사 2명 가운데 한명이 부상당하고 한 명은 간신히 빠져나가 혜산군 본서에 연락한 것으로 되어있다.

또 일제의 함흥지방법원형사부 재판기록을 보면 동북항일연군 제6사는 거창한 민족해방투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그냥 양민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방화하는 등 물자보급투쟁을 벌인 것이었다. 물자 약탈도 일본인 가옥이나 특별한 부잣집을 노린 것이 아니고 아무 집이나 닥치는 대로 턴 것 뿐이었다. 주재소를 습격하고 면사무소에 불을 지른 것은 오로지 약탈을 위한 견제 작전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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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일제의 함흥지방법원에서 작성한 보천보 사건 피의자 재판 판결문, 습격 당시 물품약탈조였던 박금철이 우두머리 김일성과 회합한 내용을 적시하고 있다. 사건 당시 박금철은 여러차례 습격 총책 김일성과 만나 지시를 받고 사건을 모의했다.
일제의 재판부가 피의자들의 죄상을 확대하면 확대하지 축소할 리가 없다. 이날 동북항일연군이 제대로 된 항일투쟁을 벌일 계획이 있었더라면 평소에 친일하는 친일파를 가려서 응징하거나 일본인에 대한 처단도 있을 법했다.

그러나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주재소 내실에서 잠자던 일본인 순사의 2살짜리 딸 하나가 유탄에 맞아 죽고, 일본인 음식점 주인 하나가 어수선한 거리에 나와 웬일인가고 소리를 치다가 총에 맞아 죽은 외에는 계획적인 처단이란 한 건도 없었다.

보천보를 습격한 동북항일연군의 유격활동은 한마디로 혁명이 목적인지 비적질이 목적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극좌모험주의 맹동노선이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산간 벽지의 촌락을 습격, 약탈, 납치를 예사롭게 했고 조금이라도 순종치 않으면 반동으로 몰아 무참하게 양민을 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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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중국 공산당 보고서. 중국 공산당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비적’이라든가 ‘반혁명집단’이라는 평을 내려 당사(黨史)에 그들의 유격활동을 제대로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비적’이라든가 ‘반혁명집단’이라는 평을 내려 당사(黨史)에 그들의 유격활동을 제대로 올리지 않았다.

북한의 김일성은 청년 시절의 중요한 시기 5∼6년을 이 극좌적 모험주의 집단 속에서 살았다. 김일성 3대 세습정권의 두드러진 특징인 테러리스트 체질은 여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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