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89년 12.12조치 당시 정부는 주가 부양을 위해 투신사에 무제한 주식매입을 지시하면서 무려 2조9000억원의 한은특별금융을 저금리로 제공했다. ‘한은→은행→투신사→증시의 다단계경로’를 통해,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주식을 사들이는 초유의 사태였다. 한은법으로 정해진 금융기관이 아닌 곳에 발권력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편법이라는 질타를 받았다.
최근 발표된 가계부채 종합대책에 한은의 발권력이 동원되면서, 정부가 또다시 ‘달콤한 유혹’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발권력이란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낼 수 있는 고유 권한이다. 한은이 돈을 만들어 정책자금을 공급하면 당장 나랏빚이 쌓이거나 세금을 올려야 할 필요는 없어진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유동성 확대로 화폐가치를 떨어뜨리고 물가를 끌어올리는 등 부작용이 있다.
2일 금융권에 따르면, 정부는 최근 가계부채 안정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한은과 함께 주택금융공사에 2017년까지 자금을 4000억원 추가 출자해서 공사가 주택저당증권(MBS) 잔액을 지난해 말 53조7000억원에서 2017년 말 100조2000억원까지 늘리게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다. 세수가 부족한 정부가 한은의 발권력을 너무 쉽게 동원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공적자금 투입의 경우 국회의 승인이 있어야 하지만, 발권력 동원에는 이런 절차가 없다.
이미 정부가 2000년부터 작년 말까지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해 대출·출자·출연한 금액은 4조429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2009년 시행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중은행의 신용경색완화를 위한 자본확충펀드에 대한 대출금이 3조3000억원으로 가장 컸다. 현재 잔액은 4900억원이며 내달 말 전액 회수될 예정이다.
2006년 중 한은이 자산관리공사에 지원한 생계형 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의 신용회복지원 대출도 4462억원이었다.
전자는 은행의 자구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적자금이 투입돼야 하는 곳에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해 지원한다는 비판이, 후자는 한은법상 직접 지원이 불가능한 공사에 지원을 하다 보니 정책금융공사(당시 산업은행)를 통한 ‘우회 지원’을 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이는 위법은 아니지만, 법이 정한 금융기관 이외의 곳에 편법으로 발권력을 동원한 것이다.
이 밖에도 한은은 발권력을 바탕으로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금융중개지원대출(옛 총액한도대출) 한도를 2000년 7조6000억원에서 작년 3월 12조원까지 확대했다.
이는 과거 개발금융시대에 번성했던 정책금융을 1990년대 중반 대폭 정리하면서 임시로 한은에 남겨둔 것이다.
특히 2011년 한은법 개정으로 제1조에 ‘물가안정’ 외에도 ‘금융안정’ 조항이 포함되면서 정부는 한은의 발권력을 더욱 부담없이 발동할 수 있게 됐다.
작년 하반기 정부가 ‘굴뚝산업’인 건설·조선·해운업체를 살리기 위해 발권력을 동원한다고 발표한 것과 최근 발표한 가계부채 대책이 대표적인 예다. 전자는 한은이 정책금융공사에 저금리로 돈을 빌려줘 시중 실세금리로 운용함으로써 차익을 얻고 이를 신용보증기금에 출연하는 우회 대출 방식이다.
실제 법개정에 앞서 한은 일각에서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빌미로 한은에게 금융시장 안정 책임만 가중시키는 방향으로 법이 개정되면 발권력을 동원해 유동성을 공급하라는 압력만 가중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정부도 발권력 동원과 관련된 가계부채 대책 보도해명자료에서 ‘한은법 제1조에 명시된 ’금융안정‘ 책무를 이행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강조했다.
오정근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정부가 (정책을) 좌지우지하면서 한은에 돈을 대라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은은 글로벌 금융위기 후 세계적으로 봤을때 중앙은행의 업무가 확대되고 있다는 입장이다.
한은 관계자는 “중앙은행의 기능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안정, 성장 지원 등으로 확대되는 추세”라며 “한은은 국가경제발전과 금융안정은 물론 물가안정 등 여러 여건을 감안해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며, 유동성관리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