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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 칼럼] 원자(at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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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용 기자

승인 : 2011. 09. 07. 15:24

최정호 최정호서형외과 원장(의학박사)
최정호 최정호서형외과 원장(의학박사)
[아시아투데이=이순용 기자] 물리학은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무엇으로 되어있을까? 이러한 물질은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인가? 우리는 탈레스로부터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생각의 역사를 살피고 있는 중이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도출된 E=mc2이라는 식을 공부하다가 질량과 에너지의 가역성이라는 혁명적 상황을 만나게 되었다. 세상은 이제 물질의 기본 구조와 특성에 대하여 정성적이며 정량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내몰렸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과학혁명의 단계에서 많은 과학자들은 시대적 요구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바뀌고 물질은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게 되었다. 원자는 깨어지지 않는 기본입자가 아니라 스스로 붕괴되어 빛을 내기도하는 세상의 근본이 뒤죽박죽된 혼란을 정리해야 하는 임무를 외면할 수 없었다.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사한 질문에 대하여 물이라고 답을 제시한 탈레스로부터 그리스 ‘생각의 발견자’들은 각각 여러 가지 그럴싸한 답을 내놓았다. 그 중에서 우리는 만물이 깨어지지 않는 기본단위인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데모크리토스를 원자론의 창시자라고 부른다. ‘변화’와 ‘존재’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논쟁을 구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알려진 ‘원자론’은 실험 물리학이 아닌 이론 물리학적 결론이고 철학적이며 사변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사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과학적 가설이 아니라 철학적 상상이었다. 그 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원자론이 다시 과학자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하게 된 이유는 화학이 발달 하면서 부터이다.

현대 화학의 창시자로 인정하는 보일은 1627년 아일랜드의 대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기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는 납덩이와 깃털이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갈릴레이의 예견을 증명하기 위해 훅의 도움을 받아 진공펌프를 만들어 실험을 했던 보일은 전기는 진공 상태에서도 흐른다는 것과 소리는 진공을 통하여 전달되지 않는 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알아냈다.
진공상태에서 동물들의 죽음을 관찰한 보일은 공기가 신비롭게 전 세상에 고루 퍼져있는 자연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 명확한 성질을 가지는 단순한 물질이라고 생각하였다.
공기의 부피가 반으로 줄어들면 공기압을 나타내는 수은주의 높이가 2배가 되는 것을 관찰한 것이 보일의 법칙이다. 이를 준거로 그는 기체가 진공상태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분리 가능한 입자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고 깨달았다. 보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과 파라셀수스의 3원소에 반대하여 원소들은 기본적으로 입자라고 단언한 현대 화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의 원소에 대한 정의는 “어떤 원시적이고 단순하거나 또는 어떤 것도 혼합되지 않은 물질로서 어떤 다른 물질로부터 생성되어서는 안 되며, 이러한 물질들이 모여 혼합물을 이루었을 때 이 혼합물로부터 각각의 물질들을 분리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보일과 동시대인이며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로 인정받는 뉴턴은 우주가 움직이는 법칙을 발견하였지만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에 대해서는 ‘연금술’이라는 비과학적 신비주의에서 한 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폴 스트레턴은 이를 “과학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마음에 들어 있던 가장 위대한 쓰레기”라고 말했다. 중세를 관통했던 ‘연금술’에 대한 뉴턴의 태도는 지적이고 과학적인 만유인력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연역한 천재로서가 아니라 저돌적이고 신비주의에 빠져들어 간 형이상학적 독단으로 일관했다. 먼 훗날 현재의 과학자들 역시 이러한 평가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는 자신하지 못할 역사적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유니테리언 목사이자 위대한 실험과학자로 알려진 프레스틀리는 1774년 열을 가해 만들어진 붉은 벽돌색의 수은석회를 플라스크에 넣었다. 그런 다음 태양빛을 확대경으로 집중하여 수은 석회에 열을 가하여 얻은 기체를 얻어 이를 ‘디플로지스톤 공기’라고 칭했다.

이는 당시의 과학계에서 믿어졌던 플로지스톤 이론에 적합한 기체였다. 즉 그가 발견한 이 기체는 양초를 빨리 타게 했는데 이는 양초가 플로지스톤을 빨리 내보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기체(산소)는 플로지스톤이 들어있지 않은 공기의 형태이므로 플로지스톤을 빨리 흡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 새로운 기체를 ‘디플로지스톤 공기’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파리를 방문했던 프레스틀리는 라부아지에와의 저녁식사 중에 그가 발견한 ‘디플로지스톤 공기’에 대한 설명을 하였고 라부아지에는 그 실험을 여러 가지 노력으로 재현하여 공기는 명확히 두 가지 기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디플로지스톤 공기’가 모든 공기에 포함되어있고 그 비율은 5분의 1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또 그는 오랫동안의 플로지스톤 이론과는 반대로 물질이 연소하는 동안 신비적인 플로지스톤을 유리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 중에 들어있는 5분의 1의 ‘디플로지스톤 공기’와 반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부아지에는 이 원소를 그리스어로 ‘산’을 의미하는 옥시oxy와 만들어 내는 것이란 뜻의 -gen으로부터 이 기체를 산소(oxygen)이라 명명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1789년 ‘화학 교과서’를 저술하여 그때까지 알려진 화학 원소의 목록을 새로운 명명법으로 정리하였다. 이 때 발표된 33개의 원소 목록 중에 단 두 개만이 틀렸을 뿐인데 이 두 개는 빛(light)과 열(caloric)이라 이름 붙여진 원소로서 그는 빛과 열을 가벼운 액체 혹은 물질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라부아지에의 열에 대한 개념은 다음 반세기동안 열에 관한 연구를 방해하였다고 하니 과학의 역사에서 권위의 독단이 미치는 폐해를 예시하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1776년 영국의 외딴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돌턴은 퀘이커 교도였다. 그는 10대 때에 학교 교사가 되었고 기상학에 열정을 가진 재능있는 과학자였다. 그는 30세 때 처음으로 기상학적 강박관념으로 대기의 구성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기체가 작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보일의 개념을 받아들인 돌턴은 수소의 무게를 1로 하여 다른 원자의 무게가 정수비로 가진다는 것을 밝혀냈고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원소표를 만들고 원자량을 측정하면서 황, 철, 수은, 산소 같은 기본입자들이 ‘원자’라는 기본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2000년 이상 잠자고 있던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돌턴에 의해 부활 되었고 이러한 원자론으로 당시의 화학반응이 잘 설명되었다.(1808년) 돌턴의 원자론 이후 19세기 많은 과학자들은 ‘ 모든 원자는 내부에 세부 구조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원자를 이루는 세부적 구성 요소는 무엇인가? 영국의 윌리엄 프라우트(1785-1850)는 1815년 “모든 원자는 수소 원자로 이루어져있고 임의의 원자는 수소원자 무게의 정수배로 나타날 것이다” 라는 가설을 발표했다. 프라우트 가설을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모두 그 진위여부를 검증하기 시작했다. 이 검증이 시작된지 70년이 지난 후 1886년 크룩스는 “수소 원자 무게의 정수배로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사례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프라우트의 가설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사료 됩니다”고 영국 학술원의 기조연설에서 말했다. 그러나 1920년이 되어 윌리엄 에스틴이 개발한 정밀한 측정기구가 원자의 질량을 정확히 측정할 때 까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쪼개지지 않는 원자보다 더 기본적인 알갱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톰슨이다. 톰슨이 전자를 발견하기 전 인 1896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투안 앙리 베크렐이 우연히 방사선을 발견하여 ‘원자는 그 형태를 영원히 유지 한다’는 오래된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1897년 캠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인 톰슨은 진공상태의 유리관 속의 양 끝에 금속으로 된 전극을 집어넣고 전압을 걸어 실험한 후 음극선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빛이 음극선 안의 기체에서 떨어져 나온 음으로 대전된 새로운 물질임을 알아냈다. 이를 ‘전자’라고 명명하고 이 전자의 질량이 양성자 질량의 1860분의 1이라는 것도 밝혀냈다. 톰슨은 ‘원자’가 쪼개지지 않는 궁극적 입자가 아니라 더 작은 구성 물질로 되어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이제 과학자들은 전자라는 새로운 상태의 물질을 발견함으로서 “ 모든 물체는 지금 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작은 단위까지 세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라우트는 사물의 기본요소가 수소라는 가정을 내세웠지만 이제 다수의 과학자들은 전자가 모여서 원자가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00년에 조지 피츠제럴드는 500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수소원자 모형을 제안했고 1903년 톰슨은 수소원자가 1000여개의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자가 전자로만 이루어졌다면 다음 두 가지가 설명되지 않았다. 첫째 원자가 전기적으로 중성이라는 것이다. 전자로만 이루어 졌다면 그 많은 음전하는 다 어디로 갔는가? 원자가 전체 전하를 0으로 상쇄시키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마땅한 답이 없다. 둘째는 여러 개의 전자로만 원자가 이루어졌다면 전자끼리의 반발로 원자가 불안정하고 붕괴되어야했다. 어떻게 원자는 오랜 시간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과학자들은 양의 전하를 가지는 물질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양전하는 어떤 형태이며 원자의 어느 부분에 분포되어 있는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현대인은 중등학교학생 물리나 화학교과서를 통해서도 답을 알고 있지만 110년 전 에는 세계 최고의 석학들도 짐작할 수 도 없는 난제였다. 결국 톰슨은 양전하를 띠는 커다란 구형 물질 속에 전자가 여기저기 밝혀 있는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그래서 이를 푸딩모형 혹은 건포도모형이라고 부른다.

톰슨 이후 10여 년 동안 물리학자들은 방사능 붕괴의 부산물로 나타나는 원자들을 집중분석했고 1910년에는 방사능 붕괴로 나타나는 원자들이 원래의 원자와 화학적으로는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있지만 무게(원자량)이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를 프레데릭 소디는 1913년 방사성 동위원소라고 명명했다. 톰슨의 모형은 그의 제자 러더포드에 의해 교정되고 또 러더포드의 모형 역시 그의 제자인 보어에 의해 변화를 당하게 된다. 20세기 초 원자의 모형은 캠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제작된 한 편의 드라마이다. 영국의 식민지 뉴질랜드 출신의 러더포드와 덴마크 출신의 활달한 보어는 드라마의 주역을 담당했다. 이 드라마는 협조와 경쟁이 뒤섞인 휴먼 드라마이면서 진리를 향한 치열한 논쟁의 서사시이다. [계속}
이순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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