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회 한국피겨선수권대회가 열린 태릉 실내빙상장은 관중석이 100여석 남짓한 '경기장'이 아닌 '연습장'이었다. 관중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은 사진에 보이는 곳이 전부였다. |
제65회 한국피겨선수권대회.
근처 볼일을 마치고 오는 길에 와이프와 데이트 겸 들렀던 발걸음이었습니다. 지난해 10월 집 근처 고양 어울림누리에서 열린 피겨선수권대회를 본 경험이 있어서 자연스레 일정을 알고 있었고 좋은 구경 시켜준다며 신나게 운전대를 돌렸습니다.
온 세상이 구제역과 동장군의 극렬기세에 눌려 방안에서 텔레비전과 컴퓨터로만 씨름하던 차에 이런 안전한 곳에서의 겨울행사가 어찌 반갑지 않으랴…
흰 눈을 지치며 스키나 보드를 타지 못할 바엔 새하얀 은반 위를 수놓는 가인들의 몸짓과 아름다운 음악을 현장에서 직접 감상하는 일은 얼마나 고상한가?
더구나 순위결정이라는 스릴까지….
하지만 날이 너무 추웠던 걸까요? 아무리 입장권도 없는 ‘무료대회’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들만의 잔치’의 썰렁함과 관객에 대한 무성의에 차디찬 실망감을 안고 나왔습니다. 이한치한(以寒治寒). 결국 그날 저녁 차가운 맥주와 냉소적인 토론(?)으로 해소할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 부부는 별별 탓을 다해봅니다. 김연아가 문제다. 아사다 마오가 문제다. 아니, 지난달 저의 지독한 독감까지 거론됐습니다. 그놈 때문에 지난 크리스마스 연휴동안 두문불출 집안에 박혀 여느 국제대회 못지않은 일본 내셔널피겨대회를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입니다. 김연아가 아사다 마오를 비롯한 쟁쟁한 세계 피겨선수들과 겨뤄 세계의 퀸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옆 나라에서 화려하게 치러지는 잔치를 보며 이러쿵저러쿵 훈수 두던 습관 때문에, 메달리스트들을 비롯한 세계 피겨스타들이 왕창 몰려와준 아이스쇼들 덕분에 국내 피겨대회 모습은 그 수준에서 조금 쳐지겠지 정도로만 생각한 일반인들의 눈높이가 문제라는 결론에 까지 이르게 되었지요^^
사실 주최 측의 대회 운영이나 대회장 분위기가 너무 엉성했습니다. 하지만 연맹 탓만 한다고 해결의 묘수가 보이진 않네요. 쟁쟁한 기업 혹은 자치단체가 이권이나 명예를 걸고 달려드는 프로스포츠가 아닌 이상 어떤 분야든 협회나 연맹이란 공공의 이름으로 펼칠 수 있는 활동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김연아라는 천재일우의 특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는 하지만 객들이 알 수 없는 관계자들의 내부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희망적인 것은 비록 대회 포장은 허술하나 내용물은 갈수록 알차게 영글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선수들의 실력이 지난 고양대회보다도 더 나아졌다는 평이 많고요. 노비스와 주니어선수들의 참가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부디 앞으로 꾸준히 인프라와 팬 층이 두터워져 시각과 청각의 종합예술스포츠인 피겨가 프로야구나 축구처럼 국민들의 여가생활에 큰 도움을 주는 생활스포츠로 발전하길 빌어보는 수밖에요.
그런데, 지난 고양 회장배대회와 이번 피겨선수권대회를 보면서 몇 가지만은 꼭 고쳐주었으면 좋겠다 싶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점수 계산 오류나 정빙기 고장 등의 대회 운영상의 실수가 아니라 대회를 늘 치르는 관계자들(연맹관계자, 코치, 선수들, 학부모 모두 포함)은 습관처럼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지 모르나 관객으로서는 영 낯설고 어색한 모습들! 꼭 고쳐주었으면 하는 민망한 장면 3가지입니다.
경기가 끝난후 팬들이 던진 선물을 줍고 있는 선수들. 화동들이 없어 선수들이 직접 주워야했다. 특히 윤예지 선수는 경기중 몇차례 넘어진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선물을 줍는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
- 화동을 구하지 못할 바엔 선물 던지지 말자.
프로그램이 끝나고 박수 소리와 함께 빙판 위로 날아드는 선물은 그 선수에 대한 찬사이자 인기의 척도입니다. 그런데 찬사를 받는 선수들의 모습이 너무 안쓰럽습니다. 기진맥진 프로그램을 마친 선수가 허리를 굽혀 일일이 과자 봉지, 초콜릿 등을 주우러 여기 저기 다니는 모습이 불쌍하다 못해 웃기기까지 했습니다. 연기 중 몇 차례 넘어졌던 윤예지 선수는 다리 한쪽을 절뚝거리면서도 주워야 했지요. 어떤 선수는 들어오다가 다음 차례 선수의 코치가 저기 것도 주워 나오라는 말을 듣고 다시 들어가 주워오기도 했습니다.
여신처럼, 왕자처럼 멋지게 차려입고 자신의 프로그램을 몰입했던 선수가 갑자기 헉헉대며 허리 숙여 선물을 줍는 모습에서 12시가 넘어 재투성이로 변한 신데렐라가 떠올랐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이나 자원봉사자를 구하든지 아니면 아예 선물은 나중에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보면 안될까요?
김민석 선수의 연기가 끝난후 점수를 기다리는 동안 무례(?)하게도 정빙기가 경기장에 들어와 보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점수 발표때 까지는 경기가 다 끝난것이 아니라는 피겨의 불문율이 있다. 저 정빙기는 무엇이 저리도 급했던것일까? |
- 한국인 특유의 ‘속전속결’… 이건 심하더라
선수 인사하는 동안 다음 선수 위밍업.
점수 발표 나기도 전에 돌아가는 정빙기
지난번 고양에서 열린 대회는 너무 추워서 투덜거렸습니다. 하지만 거기는 이번 태릉대회장에 비하면 대회 경기장다웠다고 할 수 있겠죠. 이번 태릉대회장은 그런대로 난방은 되었지만 좌석이 100개 정도 남짓해 많은 사람들이 2층임에도 까치발을 들고 서서 구경했습니다. 옛 시골장터에서 구경거리나면 나무에 매달려 구경하듯 이층 철조물에 올라가거나 매달려 구경하는 모습도 연출됐습니다. 사각지대가 많아서 선수들이 조금만 가까이 오면 일제히 몸을 일으켜 ‘선수찾기’ 바쁜 모습이었죠. 이렇게 힘겨운 관중들에게 위안이 있다면 속전속결의 경기방식이었습니다. 빨리 빨리를 외치는 한국인답게 모든 것이 속전속결로 진행됐더군요. 하지만 아무리 속전속결도 좋지만 기본 예의는 지켜야 되지 않을까요?
프로그램을 마친 선수가 인사도 마치기 전에 다음 선수가 경기장을 돌며 준비운동을 합니다. 모두가 그러다 보니 당연한 듯합니다. 몇몇 인지도와 인기가 있는 선수 다음에 나오는 선수들은 떨어지는 인형과 초콜릿에 맞을 뻔 했지요. 선수나 관중이나 웃었지만 씁쓸함을 지울 수 없더군요.
특히 선수의 점수가 발표되기도 전에 정빙기가 돌아가는 모습은 고양대회 이래 두 번째 구경거리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광판 하나 없이 결과는 쇼트 프리 점수 모두 뭉퉁거려 발표하는 사회자의 목소리에만 의존해야 하는데 그 짧은 시간조차도 못 참고 들어와 제 할 일을 하는 정빙기의 위풍당당함이란….
프리결과 쇼트 1위였던 김민석 선수의 종합점수는 이동원선수보다 근소하게 낮은 이변을 낳았는데 정빙기 돌아가는 소리와 웅성웅성 좌석 뜨는 소리에 묻혀 스릴도 재미도 반감됐습니다. 선수에 대한 예의도 관중에 대한 예의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요? 누가 제발 정빙기 운전 아저씨께 마지막선수의 점수 발표가 끝나고 들어오시도록 말씀 좀 해주세요.
관중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안내문. 피겨경기를 보러 오는 사람은 학부모 뿐일까? 경기장 어느곳에서도 관중을 위한 안내문이 없었고 안내방송도 하지 않았다. |
- 관중은 모두 학부모님들이어야 하나요?
"경기가 곧 시작되오니 학부모들은 관중석으로 올라가세요"
“시상식은 3층 복도에서 열리니 관계자들은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원래부터 주최 측에서 많이 보러 오라고 초대한 적도 없었습니다. 입장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관중은 모두 학부모와 코치 대접(?)을 받는 듯 했습니다. 장내 안내방송도 그렇고 시상식도 은반 위가 아닌 3층 복도에서 열리더군요. 행정 편의주의 때문이겠지만 학부모도 코치도 아닌 순수 관객으로 찾아갔던 이들은 좀 머쓱해지는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했던 점은 최근 ‘과열’의 우려까지 제기되는 김연아 팬들을 비롯해 우리나라에도 여러 모습의 피겨 팬들이 꽤 있고 관련 사이트도 많아서 소위 꽤 장사가 되는 행사일 텐데 왜 연맹에서는 그렇게 학부모들과 코치들만 대상으로 학교체육 정도로 한정하는 것일까요?
피겨는 어찌됐건 은반위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스포츠입니다. 연예인 뺨치게 아름답게 차려입은 선남선녀들이 펼친 퍼포먼스를 항상 보아온 부모들과 코치, 심사위원들만 감상한다는 것은 낭비 아닌가요? 아이스쇼까지 기획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원이라 할지라도 이런 공식대회 정도는 성의껏 기획해보면 어떨까요? 누가 알겠습니까? 야구도 축구도 구경 갈 수 없는 이렇게 추운 겨울엔 피겨 스케이트 행사장이 또 다른 가족 나들이 혹은 데이트명소가 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