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전인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고사성어로 화살을 맞아 본 새가 나뭇가지만 보고도 무서워서 피한다는 뜻이다.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은 최근 한 강연에서 이 고사성어를 인용했다.
감독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파생상품의 부실을 초래한 것을 보고 규제완화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주장이며, 규제완화를 통한 경쟁력 제고는 멈출 수 없는 과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전광우 금융위원장도 최근 인터뷰에서 “배가 가장 안전한 것은 항구에 대피해 있을 때다. 그러나 항구에 묶어놓기 위해 배를 만든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우리 정부와 금융당국은 미국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금산분리 등 금융규제 완화와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및 산업은행 민영화 등에 따른 투자은행(IB : Investment Bank) 육성이라는 정책기조를 견지해 나갈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거세 관련 법안을 둘러싸고 이번 정기국회에서 상당한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국의 전통적 IB모델 사라져
이런 논란이 벌어진 것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미국발 금융위기로 우리가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던 미국의 전통적인 글로벌 초대형 IB들이 모조리 붕괴됐기 때문이다.
당초 글로벌 IB의 빅5는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리만브라더스 및 베어스턴스 등 모두 미국회사였다.
그런데 지난 3월 베어스턴스가 빈사상태에서 상업은행인 JP모건체이스에 인수된 데 이어 지난달 15일 리먼브라더스가 파산보호신청을 하고 메릴린치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인수합병 되면서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유동성위기는 1~2위 IB인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도 피해가지 않았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은행 지주회사로 전환, 스스로 감독당국의 규제의 우산 속으로 피신했다.
미국식의 전통적 IB모델 자체가 통째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월가를 주도해 왔던 IB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반면 씨티그룹, BOA, JP모건체이스 등의 상업은행(CB : Commercial Bank)들이 부각되고 있다.
이번 격변의 영향으로 미국의 은행순위에도 지각변동이 빚어졌다.
블룸버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씨티그룹이 총자산 기준으로 여전히 1위인 가운데 메릴린치와 베어스턴스를 인수한 BOA와 JP모건체이스가 각각 2, 3위에 랭크됐다.
4, 5위는 은행으로 간판을 바꿔 단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가 차지했다.
6, 7위는 와코비아와 웰스파고인데 현재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는 와코비아를 씨티그룹이 인수하면 1위의 지위가 더욱 확고해지는 반면, 웰스파고와 합병하게 되면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를 다시 밀어내고 4위에 오를 수 있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메릴린치가 어떤 회사였던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우리 정부와 금융업계가 꿈꾸던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이었다.
자통법을 만들면서 금융위는 “한국판 골드만삭스, 메릴린치를 만들겠다”고 공언해 왔는데 목표 자체가 사라져버린 셈이다.
■IB 육성정책 재검토 논란 거세져
이에 따라 이번 사태를 계기로 IB 육성에 초점을 맞춘 기존 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에서도 이미 도태된 낡은 IB 모델을 뒤늦게 한국에 도입해 과연 성공하겠느냐는 질문이다.
더욱이 서브프라임 사태로 IB 위기론이 나온지 1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이를 고집하는 것은 ‘나 홀로 역주행’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에 회의적인 학자들이 이런 입장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장하준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문제점이 드러난 모델을 우리가 왜 뒷 북을 치면서 뒤쫓아가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금융통화위원을 지낸 성균관대 김태동 교수는 언론기고에서 “자통법을 수정해서 금융투자회사 설립을 백지화해야 한다”며 “산업은행의 IB화와 금산분리 완화를 즉각 취소하고 금융감독기구를 독립시켜라”고 주장했다.
한국금융연구원 신용상 거시경제실장도 “규제합리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미국식 투자은행시스템이 무너지고 금융규제가 강화되는데 우리만 거꾸로 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민주당 김효석 원내대표가 IB로 대표되는 미국식 금융모델의 폐기를 촉구하는 등, 야권은 정부의 금융정책 전면 철회를 요구하며 전의를 다지고 있으며 이종구, 이한구의원 등 한나라당의 일부 경제통 의원들도 보완론을 내고 있다.
반면 자통법 및 IB 육성정책과 미국식 IB의 몰락을 구분해 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김형태 증권연구원장은 “자통법은 IB를 위한 법이 아니라 자본시장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법”이라며 “자통법으로 반드시 미국식 IB가 도입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강조했다.
LG경제연구원 신민영 금융연구실장은 “미국 사태를 보며 효과적인 관리감독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지만 ‘상업은행이 IB보다 우월하다’는 식으로 방향을 급선회하는 것은 금융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광우 위원장도 “금산분리 완화, 자통법 도입은 미국식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자는 것이 아니고 은행소유규제의 개선이나 비은행부문 경쟁력제고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밝혔다.
또 “교통사고의 원인이 자동차의 구조적 결함(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자체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운전과실(경영자의 모럴헤저드)이나 잘못된 교통신호체계(감독시스템) 또는 과속을 막지 못한 교통경찰(감독기관)의 책임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순수 IB도 CB도 아닌 UB에 주목을
이와 관련, 미국의 국제금융계 석학인 박윤식 미국 조지 워싱턴대학교 교수가 최근 금감원 강연에서 한 조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 교수는 “한국판 골드만삭스나 메릴린치의 꿈을 꿨던 한국의 이상은 신기루가 됐다"며 ”이제는 유니버설뱅크(Universal Bank) 모델이 경쟁력이 있는 만큼 정부나 민간이나 목표를 재정립하고 유니버셜 뱅크 모델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CB에 IB 및 보험산업이 결합된 UB로 목표를 재설정하고 벤치마킹 대상을 골드만삭스 등이 아닌 씨티, UBS 등으로 수정하라는 것이다.
순수 IB가 아니라 CB의 굳건한 기반 위에서 IB 및 보험 등으로 업무영역을 확장한 UB가 대안이라는 얘기다. 이 모델은 예금과 대출을 기초로 보수적 자산운용을 하는 CB의 장점을 IB와 접목, 위험관리와 안정적 수익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잡기를 지향하고 있다.
독일 도이체방크도 변형된 IB로 미국식 IB와 달리 자산을 보수적으로 운용, 서브프라임 사태에도 불구하고 별 피해를 입지 않아 벤치마킹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우리 정부당국도 안전성을 중요시하는 유럽식의 은행계 IB를 염두에 두고 있다.
산업은행측은 “산은은 리먼브라더스처럼 예금기반이 없는 증권계 IB가 아니라 은행을 기반으로 하는 도이체방크식 IB를 지향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IB시장은 건재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장보형 연구위원은 “독립 IB들이 무너지면서 파생상품시장은 다소 위축되겠지만 IB 본연의 업무인 회사채발행 주선, 기업공개, M&A 자문 등의 시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물론 어떤 형태가 됐든 위험관리와 감독시스템 강화는 최소한의 전제조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