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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아소의 양면성과 정치 DNA

[데스크칼럼] 아소의 양면성과 정치 DNA

기사승인 2008. 10. 0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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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홍 아시아 부장

일본 자민당 전 간사장 아소 다로가 4수 끝에 총리의 꿈을 이뤘다. 자민당 소수파인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파벌 소속이던 그는 최대 계파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 파벌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에게 밀려 당 총재 선거에서 패한 아픔이 있다.

이번에는 모리의 후원 덕분에 그 높은 벽을 넘었다. 자민당의 인기가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후쿠다 총리가 전격사임하고, 다음 달 중에 총선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모리는 국민적 인기가 높은 아소를 택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아소의 얼굴에는 기쁨보다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총선에서 패배하면 자신이 사퇴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의 당선 첫 소감도 “이 순간부터 민주당과의 결전에 몰두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진정한 총리가 된다”는 것이었다.

아소의 얼굴은 두 가지다. 그를 끔찍이 귀여워한 외조부 요시다 시게루(1878~1967) 전 총리의 얼굴과 ‘비즈니스맨 아소 다로’의 얼굴이다. 아소는 일본 남부 규슈 후쿠오카현 이즈카의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다키치는 석탄 산업에서 성공한 뒤 요시다 집안과 인연을 맺었다.

아소의 외조부인 요시다는 일본이 패망한 뒤 1946~54년 총리로 재임하면서 한국전쟁 특수(特需)를 발판으로 일본을 재건시킨 인물이다. ‘미국의 방위우산 아래에서 경제발전에 전념한다’는 ‘요시다 독트린’은 일본 경제성장의 근본 철학이 됐다.

아소의 정치철학은 요시다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요시다의 무릎 위에 놀면서 “일본은 대단한 나라다.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잘 된다”는 외조부의 신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면서 자랐다. 이 영향으로 아소는 ‘일본은 아시아의 선구자’라는 강한 자긍심을 갖게 됐고 자연스럽게 그의 정치 노선은 보수 우파가 됐다. 아소의 아버지는 3선 의원이며 부인은 1980~82년 총리를 지낸 스즈키 젠코의 딸이다.

50억엔이란 막강한 재력, 시가(담배의 일종)는 쿠바 아바나산만 고집하는 귀족 스타일도 유전이다.

아소에겐 요시다의 또다른 실용주의 노선이 흐르고 있다. '비즈니스맨 아소'의 얼굴은 상인기질에서 나오는 현실감각이 있다. 그는 외상 재임 중에 강성 발언은 했지만 야스쿠니신사는 참배하지 않았다. 타협할 것은 과감히 타협했다. 아소는 실물 경제에 대해서도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다.

아소 그룹에 입사한 뒤 1971~73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주재하면서 다이아몬드 광산 등 해외 자원 개발에 전념했으며 33세에 아소 그룹 사장에 취임했다.

경제 철학도 효율을 중시한다. 그래서 작은 정부를 추구하지만 경기가 어려울 때는 재정 확대와 감세 정책을 써야 한다고 보고 있다. 서민적 말투와 유머 섞인 독설이 인기 배경이지만 국민에게 쉽게 말하려다 과도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평가도 있다.

아소는 외상 재임 시 “조선인이 원해서 창씨개명을 했다”는 등 망언을 여러 차례 했지만 지금까지 한국을 50회 가량 방문, 일부 한국 인사들과의 관계는 돈독하다. 라종일 전 주일대사는 “1.5m 거리 이내에서 보면 괜찮은 사람”이란 세간의 평에 동의했다.

송민순 전 외무장관이나 주일대사 시절의 유명환 외교장관과도 관계가 좋았다. 본심을 터놓는 친화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소 본류는 요시다의 DNA다. 우익 성향에다 일본에 대한 우월감으로 뭉쳐 있다. 비즈니스맨의 얼굴은 ‘본얼굴’을 숨기기 위한 페인트 모션이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지그시 버텨야 하는 ‘고난의 한·일 시대’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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